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요즘 장안엔 온통 영화<국제시장> 이야기로 넘쳐난다. ‘그래, 그땐 그랬지’ 하며 슬그머니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는 주인공 덕수세대가 대다수인 반면 ‘에이, 무슨 신파(新派)냐~’하며 비아냥거리는 젊은축도 많다.

그러나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 하나는, 영화주인공 덕수 세대야말로 오늘의 우리에게 그나마 먹고 살 만한 인적·물적 유산을 남겨준 개발시대의 주역이라는 점이다. 일제시대와 8·15해방, 6·25전쟁과 4·19의거, 5·16군사혁명, 그리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새마을운동에 이르기까지 굴곡 많은 격동의 우리 현대사 회오리 속을 관통해 오며 꿋꿋하게, 때론 질곡 속에서도 모질게 가부장(家父長)의 삶을 살아 온 세대다. 더도 덜도 아니고 이제는 우리사회의 그늘에서 힘 없이 볕바라기를 하고 있는 내 아버지들이다.

28년 전,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는 전쟁 통에 군대에 입대해 5년여 만에 제대한 후 인근 미군부대에 다니시면서 그 많던 논마지기 형제들 빚보증으로 다 날리면서도 가족, 특히 자식들을 위해 헌신했다. 그런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우리 5남매의 공부 뒷바라지를 하셨다. 아산만 촌바닥에서 공부좀 한다는 자식들이 판·검사가 돼 가문의 위세를 떨칠 날을 고대하면서…. 신학기 때가 되면 아버지는 대학등록금을 옷 깊숙이 허리전대에 넣어 차고 상경하셔서는 아들들에게 건네주며 말씀하셨다. “땅이라는 건 있다가도 없어질 수 있지만, 머리농사는 누가 빼앗아 갈 수 있는 게 아니잖느냐.”

그런 아버지 모습을 보며, 생각없는 동네사람들은 혀를 끌끌 찼다. 못 먹고 못 입어가며 뭔 자식공부냐고. 누구네집 딸은 ‘국민학교’만 나오고서도 가발공장 다니며 번 돈으로 고향집에 송아지 사놓고 즈네 엄마 금반지 사 주기만 하던데… 하는 거였다.

사실 그 무렵, 중학교 입학부터 본고사가 있던 시절, 형편이 안돼서 혹은 머리가 안돼 중학교 진학이 안된 친구들은 건설현장이나 공장심부름 사환, 또는 구로공단에 취직해 고향을 떠나갔다. 그나마 ‘빽줄’이 좀 있는 친구들은 읍내 공고나 농고 졸업 후에는 제법 큰 공장, 아니면 인근 미군부대의 ‘하우스 보이’로 취직을 했다. 서른 살, 마흔 살이 돼도 ‘하우스 보이’였다. 더러 얼굴 반반한 누이들은 미군기지 앞에서 미군을 상대하는 ‘양공주’가 돼 있다고도 하고, 몇몇 친구와 동네형들은 월남전에 파병도 되고 ‘싸우디’에 가 엔간히 돈도 벌어와 여봐란 듯이 장화없인 못사는 동네에 벽돌집도 지었다.

그 ‘덕수’의 아이들- 덕수 키드(kid)들도 이젠 70을 바라보는 노인이 돼 있다. 적어도 수억 재산 가지고도 가족의 목 조를 생각은 꿈에도 해보지 못했을 그 많던 ‘덕수 키즈’는 모두 다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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