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우리 옛 선인들은 변함없이 매일 뜨고 지는 해와 달인데도 새해에 뜨는 해와 달을 새롭다 못해 신령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설날 아침을 ‘원단(元旦)’이라 했고, 일년 중 첫 보름달이 뜨는 정월 대보름을 상(上)·중(中)·하(下) 중 으뜸인 ‘상원(上元)’이라 했다. 그 아래에 ‘중원(中元)’은 음력 7월 보름날 백중(百中)날로 일명 ‘머슴명절’이라고도 했다. 양력으로 가늠하면 대략 8월 중순이 된다. 이날 하루만큼은 봄부터 내내 농사일로 허리 펼날 없었던 머슴들에게 맘껏 마시고 놀게 했다. 불가에서는 지금도 여름의 안거(安居) 수행을 마치고 절에서 재를 올리는 큰 명절이다. 그 다음의 ‘하원(下元)’은 음력 4월 보름날인데 이때는 양력5월 중순으로 봄기운이 가장 무르익을 때를 택해 명일(名日)로 정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설날 이후 첫 보름날은 여느 보름날과는 다른 큰 의미가 있다 하여 별나게도 ‘대보름’이라 했다. 이날 뜨는 달도 가득 찼다는 의미의 ‘만월(滿月)’, 혹은 간절한 기원을 가지고 우러러 보는 달이라 하여 ‘망월(望月)’이라고 불렀다. <동국세시기>라는 옛문헌에 보면 ‘정월 보름달이 붉게 보이면 그 해는 가물고, 희게 보이면 장마가 든다’하여 한해 농사일에 필요한 길흉을 점쳤다.
정월 대보름은 설 명절의 정치(情致)가 사위지 않고 이어진다. 보름 하루 전날엔 찹쌀, 수수, 조, 팥, 콩으로 오곡밥을 지어 먹으며 가정의 평안과 건강, 풍년을 기원했다. 지역마다 약간씩의 차이는 있지만 경기·충청 일원에서는 이날 오후에 오곡밥 아홉그릇을 먹고 마당을 아홉번 쓸어 액운을 내친다는 속설이 행해졌었다. 옛 문헌에는 수행처럼 백집을 돌며 백그릇의 오곡밥을 먹는다 하여 ‘백가반(百家飯)’이라 칭한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와 꼭 같지는 않지만 어렸을 적 고향마을에선 엔간히 밥술이나 먹는 집이면 모두 대문 빗장을 슬며시 열어두고 빈 가마솥에 오곡밥을 한 두그릇씩 넣어 두었는데, 야심한 달밤에 동네 조무래기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밤고양이처럼 야금야금 집집을 돌며 오곡밥을 훔쳐(?)다가는 한곳에 모여 커다란 양푼에 넣고 나물반찬과 함께 야참으로 썩썩 비벼먹던 기억도 새롭다.
보름날 아침이 되면 눈 뜨기가 무섭게 밤·잣·호두·땅콩 등의 견과류를 액막이 부럼으로 깨물고, 한해 귀가 밝아지기를 기원하는 귀밝이술을 먹었다. 그러고는 휘휘 동네를 한바퀴 돌며 ‘내 더위 사가라!’하고 더위를 판다. 동네 윷놀이대회인 척사대회, 논·밭둑을 태워 쥐를 쫓는 쥐불놓이, 달집태우기, 해안 섬지방의 띠뱃놀이가 모두 보름날에 행해진 세속(世俗)이었다.
올해는 정월대보름이 2월14일로 발렌타인데이와 겹쳐있다. 요새 젊은이들이 대보름을 맘에 둘리 없지만, 초콜릿 대신 오곡밥 한그릇 권하며 정을 나누는 모습을 그리는 게 정말 헛된 망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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