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1980년대 초반에 시비(詩碑)순례 취재를 다닐 때의 일이다. 스산한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던 초겨울 들입 딱 이맘때, 서울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는 ‘세월이 가면’의 시인 박인환의 묘소를 찾았다. 낮게 주저앉은 초라한 봉분 앞에 너더댓뼘 됨직한 네모난 흰 빗돌에 새겨진 시 한 구절이 이 묘소가 박인환의 묘임을 확인시켜 줄 따름이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필시 갑작스레 죽은 터에 가세 또한 푼푼치 못한 가난한 시인이었으니
따로 장지 마련을 못하고 시립 공동묘지인 망우리 공동묘지로 왔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서울 명동 한 복판에서 한 시절을 풍미하던 시인의 자유로운 영혼은 어쩌면 터럭 한 올 만이라도 명동바닥에 묻히길 원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다음으로 찾은 곳이 서울 도봉동에 있는 ‘풀잎’ ‘거대한 뿌리’ ‘시(詩)여 침을 뱉어라’의 시인 김수영(金洙暎, 1921~68)의 묘소였다. 그의 묘소는 뜻밖에도 시인이 생전에 생계수단으로 병아리를 키우던 생가 바로 뒤편 둔덕에 자리잡고 있었다. 묘소 앞에는 어른 허리께 높이의 자연석에 시인의 얼굴을 부조(浮彫)로 새긴 청동조각과 그의 시 ‘풀잎’이 새겨진 시비가 세워져 있다.
묘소에 오르기 전 생가에 들러 인사를 청하자 흰 백발에 쪽을 찐 단아한 모습의 노인이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김수영 시인의 어머니 안형순(安亨順) 여사였다. 결례를 무릅쓰고 시인의 묘소를 생가 울타리 안에 쓴 이유를 묻자 순간 눈시울이 촉촉해 지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부모 앞서서 죽은 자식이니 더할 수 없는 불효고, 그런 불효자를 집안에 들일 수는 없는 일이지만…시퍼런 나이에 너무 안돼서…”
김수영 시인은 1968년 6월15일 밤 귀가길에 집 근처에서 버스에 치여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의 나이 47세. 애통한 모정(母情)이 앞서 간 아들을 집 울타리 안에 눕게 한 것이었다.
그것처럼 내년 하반기부터는 집 마당에 있는 나무나 화초, 잔디 밑에 화장(火葬)한 뼛가루를 묻는 자연장(自然葬)이 가능해 진다는 소식이다. 보건복지부에서 이처럼 주거·상업·공업지역에도 개인과 가족의 자연장지를 만들 수 있도록 장사법 시행령 개정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이미 우리 국민의 화장률이 70%를 넘고 나무밑에 유골을 묻는 수목장(樹木葬)도 일반화 되고 있는 마당에 집 안에 뼈를 묻는 자연장이 이상할 거야 없지만, 죽어서도 이승에서의 연(緣)줄을 이어가고자 하는 우리 민족의 질긴 혈연의식이 오히려 눈물겹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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