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희걸 본지 고문

채 희 걸
본지 고문

"일본국민들은 이웃간
식당, 양복점, 목욕탕 등
다른 업종에 종사해도
서로가 같은 주제의
학습모임을 만들어
철저하게 공부한다."

필자는 지난 22년여간 아주 절친하게 지냈던 일본인 친구가 있었다.
그와 처음 만나 친교를 맺은 것은 아마도 1989년쯤이었을 것으로 기억된다. 필자는 당시 농촌진흥청 공무원으로 일본출장중 그가 경영하는 나고야 근교 다케도요(武豊町)라는 아주 작은 도시의 여관에서 주객으로 만나 친교의 연을 맺었다.
1주정도 묵으면서 이미 친교를 맺었던 농촌진흥청의 선배와 따뜻하게 지내는 모습에 매료되었다. 이에 그에게 느닷없이 친구가 되자고 제의해 응낙을 받고 22년여 친구로서 교분을 나누었다.
그의 이름은 ‘오이와’(大岩)이다.
그는 1일 2500인분의 도시락 생산업체와 필자가 묵었던 여관 두 업체를 갖고 있다. 그는 필자와 1983년 친교를 맺은 뒤 거의 매년 부인, 아들, 딸, 아우 심지어는 20여년 이상 여관에 기숙중인 여관고객과 종업원을 대동하고 한국을 방문했다.
필자는 그의 집을 그간 여러차례 방문했으며 우리가족 모두 각기 한번 이상 방문, 여관에 묵으며 정을 쌓았다.
그는 아주 따뜻한 친한파(親韓派)이며 투철한 지한파(知韓派)였다. 그는 자신의 여관에 장기 투숙했던 농촌진흥청의 고객 다수와 각별한 친교를 맺었으며 지극한 정성을 베풀었다. 친교가 두터운 한국고객이 보낸 아들 결혼청첩장을 받으면 방한하는 성의를 보였다. 그는 우리집 일과 관련, 보증을 서준 서류에 오자(誤字)를 정정받기 위해 찾아오는 감동적인 친절을 보였다.
한편 그는 비록 여관주인이지만 한국의 역사문물과 농업부문에 해박한 지식과 정보를 갖춘 투철한 지한파인사로서 한국에 대한 식견이 비범했다.
그는 매년 한국에 올때마다 백제의 역사, 의자왕의 치적(治績), 강화고인돌의 유적, 김치 등을 소상히 얘기하는 비범한 지한(知韓)의 식견을 보였다. 그와의 이같은 왕래교류는 2006년이후 근 3년여 두절되었다. 연락두절 사유는 참혹하였기에 소개하지 않겠다.
필자는 슬픔을 가까스로 수습한 뒤 그에게 연락하자 필자를 위로하고자 찾아왔다. 놀랍게도 그는 휠체어를 타고 나타났다. 그간 그는 당뇨병으로 두발을 절단하는 아픔과 슬픔을 겪었다. 우리 가족은 크게 놀랐다.
오이와씨는 그후 바닷물이 갈라지는 제부도를 가자고 했다. 그는 제부도를 돌아보면서 전남 진도에 다리가 개통되어 진도개의 순수혈통과 진도토종 한국배추와 나주의 맛좋은 배 지키기가 힘들 것이라며 걱정을 했다.
그런 걱정을 남겼던 오이와씨가 작년 2월 뜻밖에 목욕중 실족으로 별세했다는 슬픈 부보를 받았다.
여기서 필자는 일본의 평범한 국민으로 한국의 역사문물을 속속들이 깊이 공부했던 오이와씨의 열의에 다시 한번 감복하며 비명별세에 애도를 보낸다.
일본인 친구 오이와씨를 추모하며 13년간 일본유학, 통일문제를 천착 연구했던 지인과의 일본인의 학습태도에 대해 논의할 기회가 있었다.
그 인사는 일본인들은 이웃간 식당, 양복점, 목욕탕 등 서로 다른 업종에 종사할지라도 서로 같은 학습주제의 모임을 만들어 아주 치밀하고 철저하게 공부를 한다고 했다.
예를 들면 60년대 한국영화의 광고선전 포스터와 전단지를 수집, 검토 토론하는 연구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했다. 그리고 경기도 고양시의 80년대 이후 특정지역의 개발상을 사진으로 모으는 모임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일본인의 놀라운 학습태도는 우리 모두 간과하지 말고 본받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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