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희걸 본지 발행인

채 희 걸
본지 발행인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 각기 산 흔적을 남기고 떠난다.
현대그룹창업주 정주영은 숱한 사업을 만용에 가까운 열정으로 밀어부쳐 신화에 가까운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초졸(初卒)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세계적인 현대그룹을 일궈낸 시대의 거인이다. 그는 경부고속도로를 닦아냈다. 부산항을 비롯한 많은 항만을 건설했다. 나라 전력(電力)의 50% 내외를 공급하는 원자력발전소를 세웠다. 그리고 열사(熱沙)의 땅 중동을 비롯하여 세계곳곳 길을 닦고 댐을 막았으며 항만과 큰 건물을 지었다.
그는 큰 사업을 하면서 숱한 일화를 남겼다. 거북선이 그려진 지폐한장을 보여주며 막대한 조선소건설자금을 빌려왔다. 울산에서 멀고 먼 사우디 주빌만옹벽 구축용 철구조물을 험한 뱃길 바지선으로 끌고 가 엄청난 공비를 줄였다.
그는 소소한 반대에 굴복하지 않고 뜨거운 열정으로 건설, 조선(造船), 자동차, 해운 등 기간산업을 이끌었다.
그는 현대그룹 뿐만이 아니라 나라발전을 힘차게 견인했다.
현대그룹은 3월21일 정주영회장 10주기를 맞아 대대적인 추모행사를 가진다고 한다. 농촌여성신문은 한때 한국의 최대 농민이었던 정회장의 얘기를 더듬어 본다.
강원도 통천이 고향인 정주영은 손톱이 닳아 빠져가며 돌밭을 한뼘한뼘 농토로 일궈간 아버지에게 농토를 바치려고 서산간척을 했다.
자동차를 타고 시속 40km로 돌아도 한바퀴 돌아보는데 3시간반이 걸리는 서산간척땅. 한해 50만 명이 먹을 쌀을 거두는 땅, 여의도의 33배 김제평야보다 넓은 4천7백만평의 거대농장, 국민 1인당 거의 1평씩 나눠줄 수 있는 땅.
그는 이 농장을 개간해 놓고 아버지가 일찍 타계(他界)한 애석함 때문에 통한(痛恨)의 눈물을 훔쳤다.
우리의 지도를 바꾼 대역사(大役事)는 78년 하반기 해외건설 경기가 퇴조를 보여 건설현장에 투입됐던 건설장비와 인력을 흡수, 일자리만들기를 위해 발의되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그해 11월 매립허가를 땄다.
그러나 박대통령 서거로 인한 정치적 불안과 자금사정 등으로 지체되다가 83년 공사가 착공되었다. 물막이공사, 조석으로 간만의 차가 극심하고, 썰물 때는 물오리의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물살이 세 방조제공사를 하는데 여러 악조건과 맞서야 했다.
총 연장 6,400여m의 방조제중 270m 최종 물막이공사가 난관이었다. 승용차만한 바윗덩어리가 바닷물에 들어가자마자 흔적없이 쓸려갔다. 코끼리에게 비스켓을 먹이는 것 같았다.
이때 정주영은 해체해서 고철로 팔아먹을 생각으로 30억원 들여 사둔 스웨덴고철선 워터베이호를 끌어다 물줄기를 막았다. 이 물막이공법으로 290억원의 공비를 절감, ‘뉴스위크’와 ‘타임’ 지 등 전세계 미디어에 보도됐다.
그는 농장개간 뒤 헬리콥터로 씨를 뿌리고 농약 살포하는 미국농법을 답습, 아버지의 고달펐던 농사한풀이를 자신이 대신 한껏 풀었다.
그는 틈나는대로 새벽에 서울자택을 떠나 농장을 방문하여 소 1,700여마리 우사를 둘러봤다. 그리고 하루 4마리 생산되는 송아지가 마냥 귀여워 쓰다듬고 어루더듬었다.
그는 어둠이 덜 걷힌 암흑같은 새벽녘에 손수 차를 몰아 농장을 순회하다 바다에 빠지는 곤욕도 감내했다.
그는 말년에 금강산관광을 개발하고자 소 500두를 북한에 보내는 이벤트를 연출했다. 소를 손수 끌고 휴전선을 넘어가 북한측에 인도했다.
이 이벤트를 ‘워싱턴포스트’ ‘르몽드’ ‘요미우리’ 등 많은 세계 언론의 기자들이 앞다투어 톱뉴스로 보도했다.
이는 현대그룹 홍보뿐만이 아니라 세계 속의 한국 이미지를 크게 각인시켰다.
그는 이처럼 남들이 도저히 생각하지 못한 상상초월의 무모 또는 비범한 아이디어를 창안하여 성공적으로 일을 마무리 했다.
정주영, 그가 떠난지 어언 10년.
불세출의 비범한 능력으로 현대그룹 뿐만이 아니라 나라발전을 이끈 그의 열정이 못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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