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밋자루 나도 몰래 내던지고/ 말만 들은 서울로 누굴 찾아서/ 입분이도 금순이도 단봇짐(單褓~)을 쌌다네~♩♪’

김정애란 가수가 부른 흘러간 옛노래 ‘앵두나무 처녀’의 노랫말이다. 옛 전통사회의 지엄한 가부장제(家父長制)와, ‘어려서는 부모를 따르고 시집 가서는 지아비를 따르며, 늙어서 남편이 죽고 난 뒤에는 아들 자식을 따르라’는 ‘삼종지도(三從之道)’의 사슬에 꽁꽁 얽매여 살던 당시 아녀자의 도덕적 일탈을 직설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가사노동에 허리 펼 날 없이 숨죽이며 살았던 당시의 아녀자들에게 우물가는 커뮤니케이션의 공간이요, 해방구(解放區)였고, 그곳에서 꽃다운 열아홉 처녀는 “난 자유다!”하며 무단가출 해 무작정 상경(上京)을 결행한다. 이를 두고 바람 났다 했으니 되레 가슴 짠한 연민이 앞선다.

바람으로 치면 이 바람 저 바람 해도 춤바람에 치맛바람을 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춤바람 하면 딱 60년 전에 있었던 ‘희대의 바람둥이’ 박인수 사건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카사노바’라고까지 불린 박인수란 인물이 해군 헌병대위를 사칭해 춤바람 난 여대생과 유부녀 76명을 농락, 혼인빙자 간음죄로 구속되었던 사건이다.

박인수는 대학교 중퇴 후 해군 헌병으로 복무하던 중 사귀던 애인에게 배신을 당하자 타락의 길을 걷기 시작, 뛰어난 사교춤 실력과 훤칠한 외모를 앞세워 당시 해군장교구락부, 국일관, 낙원장 등의 댄스홀을 무대로 이른바 ‘처녀사냥’에 나서 1954년부터 1955년 1년간 무려 76명의 여성들을 유혹했다. 피해여성의 상당수가 여대생들이었고, 국회의원과 고위관료의 딸들도 있었다. 법정에 선 박인수는 혼인빙자 간음죄를 부인하고, “자신은 결혼을 약속한 적 없고, 여성들 스스로 몸을 제공했다. 관계한 여자들 대부분이 처녀가 아니었으며, 단지 미용사였던 스물세살의 여성 하나만 처녀였다”고 주장했다. 이 진술을 바탕으로 ‘순결 확률은 70분의 1’이라는 유행어가 생겨나기도 했다.

당시 재판장이었던 고(故) 권순영 부장판사는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 보호할 수 있다’는 명판결을 내려 혼인빙자 간음죄는 무죄, 공무원 사칭죄만 유죄를 선고해 소위 요즘 얘기되는 ‘성(性)의 자기결정권’을 인정한 엄청난 진보적 판결을 내려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그러나 박인수는 결국 2,3심에서 사회여론을 의식한 재판부 결정으로 1년 징역형의 유죄가 선고돼 철창행이 확정됐다.

요즘 62년 만에 그동안 끊임없이 논란이 되어 온 간통죄가 폐지돼 시끄럽다. 이래저래 이런 저런 바람으로 나라 안이 바람 잘 날이 없다. 문득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 싯구절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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