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아주 어렸을 적,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노래가 마을마을 구석구석에 귀에 딱지가 앉도록 울려퍼지기 훨씬 전의 얘기다. 아산만, 그중에서도 지금의 방조제 안쪽 평택호 내수면 간척지 땅을 일궈 평택쌀의 주산지가 된 도두리란 마을이 있다. 지금은 미군기지 이전부지로 논이며 마을이 거의 수용돼 본부락 몇십호만 남아 겨우 명맥을 이어가는 처지가 됐지만, 그 전까지만 해도 자연부락으로서는 드물게 300호 가까운 농가호수나 농지규모면에서 평택군내에서는 첫손에 꼽던 부촌(富村)이었다.
마을 안에는 옛 공회당 건물이었던 마을회관 한켠의 협동조합 구판장, 그리고 동네 조무래기들이 시때없이 코박고 있는 구멍가게 두개가 있었는데, 이곳이 마을사람들이 최소한의 생필품을 그것도 때론 외상으로 구매할 수 있는 상점이었다. 큰 장(場)은 따로 봤다.
마을에서 10리가 족히 넘는 아산 둔포에는 7일장이 서고, 40리가 실히 되는 평택 읍내에서는 5일장이 서 번갈아가며 장보기 나들이를 했다. 현금을 쉽게 손에 쥘 수 있던 때가 아니었으니 의당 현물인 쌀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장날이 다가오면 벼통가리에서 필요한 만큼의 벼를 내어 방아를 찧은 다음 꼭두새벽에 쌀가마니를 장터 싸전에 실어내는 방앗간집 우마차에 먼저 실려보낸 다음 뒤따라가 만나 쌀 판매대금을 건네 받고, 그 돈으로 장을 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읍내 큰장 보기는 바깥주인, 작은 7일장 보기는 안주인의 몫이 됐다.
마을에서 쌀 이상으로 큰 목돈이 되는 건 소였다. 몇년 공들여 키운 소를 앞세우고 해뜨기 전 이른 새벽 집을 나서 터벅터벅 서너시간을 걸어 읍내 쇠전에 내다 판다. 그렇게 힘들게 손에 쥔 목돈의 대부분은 새끼들의 머리농사를 위한 등록금으로 쓰였음은 물론이다.
흡사 석기시대 이야기 같은 이같은 장보기 풍경이 고작해야 반세기 전후의 일인데, 요즘엔 장보기 풍경이 상상도 못할 정도로 스마트하게 진화했다. 매장엔 물건이 아니라 제품 사진을 붙여놓고 그 제품사진 옆에 종이 바코드가 놓여져 있다. 구입하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그 물건 사진 옆에 놓여 있는 종이 바코드를 플래스틱 바구니가 아닌 장바구니 모양의 작은 종이상자, 이름해서 ‘페이퍼 카트(Paper Cart)’에 넣어 계산대 직원에게 건네준다. 그러면 직원은 바코드로 계산을 끝내고 알려준 주소로 구매한 물건을 집에까지 배송해 주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QR코드매장’도 인기리에 성업 중이라니 SNS의 무한진화가 실로 놀라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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