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60, 70년대에 서울의 대표적인 놀이명소로 꼽히던 곳이 창경원과 남산, 뚝섬이었다. 창경원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동·식물원이 있어 사시사철 남녀노소 가림없이 관람객들로 넘쳐났다. 남산은 서울의 전경을 한눈에 훑어보는 재미도 재미려니와 남산의 북쪽 등짝을 타고 오르내리는 빨간 케이블카가 오금저리는 쾌감을 맛보게 해주었던 명물이었다. 또한 뚝섬은 수영장 등 물놀이 시설이 거의 없었던 서울에서 물놀이와 더불어 경마까지를 즐길 수 있었던 서울의 대표적인 강변 유원지였다.
이중에서도 특히 창경원은 해마다 봄철이 되면 벚꽃이 꽃구름처럼 환하게 피어 절정을 이루는 때에 맞추어 일정기간동안 야간에도 문을 열어 꽃구경을 하게 했던 ‘밤벚꽃놀이’가 최고의 인기였다. 당시는 12시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어서 퇴장시간이 넘어서까지 꽃그늘 아래서 정신없이 은밀한 밀회에 빠져있던 아베크족들이 미처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다간 근처 여관을 찾는 일이 허다했다.
원래 창덕궁과 이웃한 창경궁이었던 것이 전국 각지에 있는 진귀한 동·식물을 그러모아 동·식물원을 만들고, 명칭이 창경원으로 바뀐 것은 일제의 강제병합이 있기 한 해 전인 1909년 이다. 나라의 주권을 송두리째 일제에 빼앗긴 상황이었으니 저네들이 궁궐 전각들을 마구잡이로 헐어내고 동·식물원을 만들어도 말 한 마디 하지 못하던 조선왕조의 마지막 몰락의 역사현장이 곧 창경원이었다. 게다가 우리의 토종 수목들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그들의 국화(國花)인 ‘사쿠라’, 즉 벚꽃을 심어 민족혼의 말살을 기도했다.
당시 조선의 궁궐인 창경궁을 동·식물원을 갖춘 ‘창경원 유원지’로 탈바꿈 시키는 대역사(?)를 기획한 조선조정 궁내부(宮內部)의 일본인 차관은 침략자의 마각을 그대로 드러냈다.
“창경궁을 헐어 동·식물원을 만드는 것은 그 자체가 조선의 주권과 조선 황실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효과가 크다. 대외적으로 명분이야 조선의 황제(순종)가 할 일이 없어 따분해 하니 동·식물원을 구경하며 무료함을 달래게 하기 위함이라 하면 될 것이다.”
이렇게 생겨나게 된 창경원은 76년간 ‘일제 잔재’라는 불명예를 이마에 달고 있다가 정부의 ‘창경궁 복원계획’에 의해 1984년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곳에 있던 동·식물원은 철거되고, 동물들은 모두 과천의 서울대공원으로 옮겨갔다.
예전 같지는 않지만 지금도 창경궁의 벚나무는 지난 아픈세월은 아랑곳 하지 않고 이맘때만 되면 변함없이 흐드러지게 서러운 꽃을 피워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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