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재학 중 ‘노래자랑’ 출연
5주 연속 우승 발군의 실력
전속 회사 여가수들 대상
오디션 경쟁 끝에 ‘여고시절’
​​​​​​​주인으로 낙점…일약 스타덤

■ 박해문 음악감독의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디바’

1970년대를 대표하는 트로트 가수로 시대를 풍미한 가수 이수미. 하지만 그를 톱스타로 만들어 준 노래는 여러 기타의 선율이 매력적인 포크 풍의 노래 ‘여고시절’이다.
1970년대를 대표하는 트로트 가수로 시대를 풍미한 가수 이수미. 하지만 그를 톱스타로 만들어 준 노래는 여러 기타의 선율이 매력적인 포크 풍의 노래 ‘여고시절’이다.

졸업시즌 겨냥한 ‘여고시절’ 대성공
‘어느 날 여고시절 우연히 만난 사람 변치말자 약속했던 우정의 친구였네 수많은 세월이 말없이 흘러 아~ 아~ 지나간 여고시절 조용히 생각하니 그것이 나에게는 첫사랑이었어요~.’ 

1972년, 가수 ‘이수미’의 첫 독집 앨범 타이틀곡인 ‘여고시절’의 노랫말이다. 여고생 콘셉트로 교복을 착용한 이수미의 모습이 담긴 이 앨범은 졸업 시즌을 겨냥해 2월에 나왔다. 그리고 크게 히트하면서 이수미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신인가수였던 이수미는 그해 ‘여고시절’의 인기로 신인가수상도 거치지 않고 여러 방송국의 가수상 수상이라는 영예를 안았다. 이를 기점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김추자, 정미조와 더불어 1970년대 여가수 트로이카로 불렸다. 

1952년 전남 영암 출신인 이수미는 목포여고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69년, 목포 KBS ‘노래자랑’을 통해 데뷔했다. 당시 언니들 옷을 빌려 입고 가발을 쓰고 무대에 올랐다고 한다. 

뛰어난 노래 실력을 지녔던 이수미는 5주 연속 우승하며 연말 결산 무대에 오르게 되는데, 이를 보러 온 한 음반사 관계자의 눈에 들었다.

1971년, 데뷔 앨범 ‘때늦은 후회지만’을 발표하고 트로트 가수로 활동하지만, 이수미를 톱스타의 자리에 오르게 한 곡은 스탠더드 팝과 포크 계열의 곡 ‘여고시절’이다. 

이 노래는 여고생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노래 솜씨도 단연 발군이었지만, 청순가련한 미모에 섹시한 목소리는 젊은 남성들의 마음도 사로잡았다. 

‘여고시절’ 곡 하나로 국민가수로 급부상한 이수미는 당시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가수 정훈희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 

‘여고시절’은 7080 히트곡 모음에 빠지지 않는 이수미의 대표곡이자, 1970년대를 대표하는 대중가요 명곡으로 꼽힌다. 수많은 가수로부터 리메이크됐으며, 노래의 인기에 힘입어 10대 청소년의 풋풋한 사랑을 그린 동명의 영화로 이어지기도 했다. 

‘여고시절’은 노래 취입 당시부터 가수 선정을 두고도 치열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여고시절’의 작곡가인 김영광이 전속 회사인 오아시스레코드 소속 여가수들을 대상으로 오디션을 실시, 선배 가수였던 방주연과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며 경합을 벌인 끝에 최종 이수미가 낙점됐다. 

당시 막내 가수였던 이수미는 마지막 순서로 노래를 불렀는데, 그의 노래를 듣고 김영광이 이수미가 ‘여고시절’의 주인이라며 바로 기타 반주로 동시녹음에 들어갔다고 한다. 

톱스타 시샘하듯 ‘불운’의 그림자… 
그러나 톱스타라는 인기를 시샘하듯 ‘불운’의 그림자가 이수미를 따라다녔다. 가수생활도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1973년 여름, ‘가수 이수미, 대천해수욕장 면도칼 자해 사건’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왜곡된 소문과 이에 따른 파문이 그칠 줄 모르고 언론을 통해 재생산되면서 사건이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피습 사건을 수습하고, 관련자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했던 이수미의 거짓 진술이 발단이 됐다. 

급기야 가수협회가 이수미를 제명하기에 이르렀다. 이수미는 사건의 피해자였음에도 자해범으로 내몰린 채 사건이 종결되면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1년여의 제재가 풀리고, 이수미는 ‘내 곁에 있어주’로 1974년 다시 가수 활동에 나섰다. 이 노래로 1975년 TBC 최고 여자가수상을 수상하는 등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한다. 

그러나 불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시 큰 인기를 얻었지만, 1976년 ‘연예인 대마초 사건’에 연루돼 7년 동안 활동이 금지됐다. 이 역시 대마초를 핀 연예인들과 가깝게 지냈고,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로 내려진 결정이었다고 알려진다. 

이후 백화점 점원과 밤무대 가수로 활동하며 재기를 꿈꿨지만, 1982년 사회정화추진위원회의 징계로 연예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른 뒤 이수미는 “그때 모든 걸 내려놨다. 20년을 ‘아’ 소리 한 번 안 내고 지내다 보니 어느 날부터 말이 나오지 않았다”며 실어증 환자가 됐던 사연을 고백했다.

폐암 3기 판정을 받고 치료받던 중 2021년 9월2일, 향년 69세로 사망했다. 

그해 5월에 작업한 ‘별이 빛나는 이 밤에’가 유작으로 남았다. ‘방울새’ ‘두고 온 고향’ ‘사랑의 의지’ 등이 히트곡이다. 

박해문 음악감독은 대중음악 작곡가, 프로듀서, Seagate_DJ로 활동 중이다. 한·중 합작 팩츄얼 드라마 ‘임진왜란 1592’, JTBC 드라마 ‘나의 나라’ 음악 등을 만들었다.
박해문 음악감독은 대중음악 작곡가, 프로듀서, Seagate_DJ로 활동 중이다. 한·중 합작 팩츄얼 드라마 ‘임진왜란 1592’, JTBC 드라마 ‘나의 나라’ 음악 등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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