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의 트로트-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43> 박재란 <산 너머 남촌에는>, <님>

1930년대가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주된 양식인 트로트가 정립된 시기라면, 1950~1960년대는 일제시대 내내 축적됐던 서양음악의 양식들과 전쟁 후 흘러들어와 뒤섞여 있던 미국 대중음악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정돈된 모습을 보일 때다.
이름해서 이지리스닝 계열의 스탠다드 팝음악이다.

이 시기엔 이른바 미8군 무대 출신의 새로운 창작자(이봉조·김인배 등)와 가수들- 한명숙·박재란·현미·최희준·패티 김·이금희·위키 리·유주용·박형준 등이 번역·번안곡들로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이 노래들은 과거 일제시대 때부터 유행돼 온 트로트 가요에 비해 ‘훨씬 수준높고 고급스러운 세련된 노래’라고 대중들은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전 음악이었던 트로트의 흔적이 완전히 씻기지 않고 뚜렷하게 남아 있었음은 물론이다. 리듬은 슬로우록·스윙·블루스·차차차·트위스트·도돔바·쌈바·탱고·룸바·폴카 등 여러 리듬을 사용해 정형화돼 있던 일제시대의 트로트 양식과는 많이 구별됐다.

▲ 데뷔곡 <럭키 모닝> 앨범재킷

이러한 다양한 리듬의 노래들을 착착 잘 부르는데다 연기까지 겸해 ‘팔색조’라는 별명으로 불린 가수 박재란(朴載蘭, 1940~  )의 1956년 공식 데뷔곡 <럭키 모닝>(유광주 작사/전오승 작곡)도 그에 속하는 노래다. 가사에 나오는 ‘럭키, 모닝, 스위트 멜로디, 스위트 하트, 스위트 라이프’란 말들은 우월감의 표현이기도 한 미국 정서 그대로를 나타내는 단어들이다.

1960년대에 본격적으로 우리의 순수 서정시를 노랫말로 한 노래를 건전가요풍의 대중가요로서 크게 히트시킨 가수 또한 박재란이다.

 

▲ <산 너머 남촌에는> 앨범재킷

       <산너머 남촌에는>
1. 산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아~)꽃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오월이면 보리내음새
   어느 것 한가진들 실어 안오리
   남촌서 남풍불제 나는 좋데나

2. 산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 하늘 저 빛깔이 저리 고울까
   (아~)금잔디 넓은 벌엔 호랑나비떼
   버들밭 실개천엔 종달새 노래
   어느 것 한가진들 들려 안오리
   남촌서 남풍불제 나는 좋데나

3. 산너머 남촌에는 배나무 있고
   배나무 꽃아래엔 누가 섰다기
   그리운 생각에 재에 오르니
   구름에 가리어 아니 보이네
   끊였다 이어오는 가느단 노래
   바람을 타고서 고이 들리네

            (1965, 김동환 작사/ 김동현 작곡)

 

▲ <산 너머 남촌에는> 노래비.

시각·청각·후각의 심상을 그림처럼 그린 감각적인 시다. 이 시를 노랫말로 취한 이 노래는 반주 특히 간주에 하와이안 기타의 영롱한 선율을 깔아 박재란의 맑고도 투명한 음성을 한결 돋보이게 한다.
노래 기술상 시의 어미부분을 부드럽게 바꿨고, 셋째줄 시작 부분의 ‘아~’는 원작 시에는 없다.
본래 전체 3연으로 구성돼 있는 이 시 <산 너머 남촌에는>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사시 <국경의 밤>(1925)을 쓴 파인(巴人) 김동환(金東煥, 1901~?)의 시다.

김동환은 함북 경성 출신으로 잡지 <삼천리 문학>을 간행하며 잡지사를 직접 운영했다. <산 너머 남촌에는>은 모두 3연으로 된 7.5조 운율의 민요풍 정형시로 1927년 1월 <조선문단> 18호에 수록됐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희망, 동경’이 이 시의 주제다.
김동환은 일제 강점기 암울한 민족의 설움을 시로 노래했는데, 1950년 6.25때 납북돼 생사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뒤에 1958년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납북되기 전, <삼천리> 잡지 여기자로 일하던 소설가 최정희(1906~1990)와 동거, 두 집 살림을 하다가 서울 청운동 본가에서 납치돼 북으로 끌려간 후 영영 소식이 끊겼다. 최정희와의 사이에 김지원(80)·김채원(76) 소설가 자매를 뒀다.

▲ <님> 노래비(2001). 작사가 차경철의 고향인 울산 대운산 입구에 세워져 있다.

<님>으로 순식간에 스타덤에 올라
박재란의 본명은 이영숙(李英淑). 1940년생이니 올해로 만 여든한 살이다. 철도국에 근무하면서 교회 오르가니스트였던 아버지(이수천)와 성가대원이었던 어머니(유순남) 슬하 5남1녀 중 고명딸이다. 부모님 모두 종교(개신교-장로회)음악을 해, 그 성향을 물려받지 않았나 싶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전근에 따라 천안으로 이주해 천안여중을 중퇴했다. 1957년 KBS 전속가수(4기-강수향, 오소라, 김성국, 이진경, 황인자 등 6명)가 되면서 사실상 가요계에 데뷔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무렵 <오빠생각>(1930)을 작곡했던 작곡가 박태준(당시 인천경찰악대장)과 수양딸 인연을 맺으면서 예명인 박재란을 받고, 군예대에 발탁돼 대구에서 공식 부대활동을 하게 된다.(그러나 사실상 박재란이 ‘이영숙’이라는 본명으로 미8군 무대에 데뷔한 건 16세 때인 1956년 이다.)

그렇게 세상에 얼굴을 알리며 나화랑 곡인 <코스모스 사랑>과 김학송 곡인 <뜰 아래 귀뚜라미>를 취입해 세상에 처음 내놓게 된다. 그러나 대중의 반응이 시큰둥해 박재란은 군예대를 나와 희망·무궁화·반도악극단을 전전하며 노래와 악극출연 배우로서 대중의 인지도를 높여갔다.
그리고 1956년 <럭키 모닝>(유광주 작사/전오승 작곡)으로 공식 데뷔를 선언하고, 그 여세를 몰아 <님-창살없는 감옥>으로 정점을 찍는다.

 

       <님(창살없는 감옥)>
1. 목숨보다 더 귀한 사랑이건만
   창살 없는 감옥인가 만날 길 없네
   왜 이리 그리운지 보고싶은지
   못맺을 운명 속에 몸부림 치는
   병들은 내가슴에 비가 나리네

2. 서로 만나 헤어진 이별이건만
   맺지 못할 운명인걸 어이 하려나
   쓰라린 내 가슴은 눈물에 젖어
   애달피 울어봐도 맺지 못할걸
   차라리 잊어야지 잊어야 하나

           (1962, 차경철 작사/ 한복남 작곡)

 

이 노래는 노랫말을 지은 작사가 차경철이 이루지 못할 고향 소꿉친구와의 풋풋한 첫사랑 이야기를 노랫말로 적어 레코드사 사장이자 작곡가인 한복남에게 보내놓고 군대에 입대한 사연이 노래로 만들어지면서 화제가 돼 더욱 인기몰이를 했다.
영화는 이 노래가 뜨자 그 1년 뒤인 1963년, 노래 가사 1절 중 둘째 행- ‘창살 없는 감옥인가’에서 ‘창살 없는 감옥’(황해·이경희 주연)을 따 타이틀로 했으나, 노래만큼 흥행에 성공하진 못했다.

생애 마지막에 “나만의 콘서트 열고 싶다”
박재란의 노래들은 나오는 족족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님>은 시중에서 음반이 품절 되기도 했다.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듯 맑고 청아한 목소리,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미소녀 이미지의 수려한 외모, 그리고 상큼 발랄한 뛰어난 가창력 등, 가수가 갖춰야 할 3가지 기본조건을 거의 완벽하게 갖춘 그녀가 ‘원조 꾀꼬리’, ‘국민의 꾀꼬리’, ‘3천만의 연인’으로 불리던 일은 결코 우연이거나 무리가 아니었다.

그녀의 대중적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박재란의 당시 회고… “당시 고급차 로얄살롱을 탄 사람은 연예인 중에는 가수 최희준과 나밖에 없었다.”
동료가수로 1960년대 현미·박재란과 함께 ‘트로이카 시대’를 이끌었던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 가수 한명숙(87)은, “박재란이 진짜 가수야!”라며 엄지척 했다.

막연한 환상을 좇아 무작정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이민갔던 1973년 중반 이전까지 17년간, 대략 1000곡의 노래를 불렀다.
그중 많은 이들의 기억에 아직도 남아있는 그녀의 히트곡을 꼽아 보면 <산너머 남촌에는>, <님>외에 <맹꽁이 타령>, <강화도령>, <밀짚모자 목장아가씨>, <진주조개잡이>, <소쩍새 우는 마을>, <둘이서 트위스트>, <아나 농부야>, <야래향>, <행복의 샘터>(이양일과 듀엣곡), <아리랑 눈물고개>, <물새 우는 내 고향>, <푸른날개> 등이다.

두 어깨 늘어뜨리고 청승맞게 눈물 찍어내는 ‘뽕짝’이 아니고, 상큼발랄한 미국 취향의 젊은 노래를 부르던 ‘팔색조’는, “낙원일 줄 알았다”던 그 미국에서 속수무책으로 허무하게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두 번째 결혼과 이혼, 수십억 사기 피해와 아파트 화재까지…

가슴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져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됐다. 모든 것을 잃고, 쇠약해진 몸의 갖은 병(악성 위궤양과 신장염, 부정맥 대수술, 식도정맥류 파열)은 영혼마저 위협했다. “미국에서 죽으려고 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으니까…”라고도 했다.

그런 그를 잡아일으킨 건 종교였다.
모태신앙이긴 했지만, 독실한 크리스천이 됐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 20여 년 만에 다시 영구귀국했다.

▲ 박재란의 둘째딸 가수 박성신의 생전모습(2014년 심장마비사)

그녀는, 두 딸과의 생이별 등 그 많은 지나간 일들 중에서도, “밥을 제대로 차려주지 못했던 첫 남편과 헤어진 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라고 했다. 가수였던 팔삭둥이 둘째 딸 박성신(심장마비사)은 가슴에 못이 돼 박혔다.

다시 태어난다면, 그리고 생애 마지막으로 하고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기자가 물었다.
“데뷔 몇십 년이 무슨 의미가 있나. 다시 태어난다면, 평범한 이웃집 아줌마, 좋은 엄마로 살고 싶다. 지금 혼자이지만 행복하다. 내 곁에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다. 다시 대중가요를 부르고 싶지 않지만, 나만의 콘서트를 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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