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광희 칼럼 - 누리백경(百景)(164)

# 김장이 한창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채소를 소금에 절인 형태로 김치를 담가먹었다는 게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김장 풍습에 대한 가장 오래된 최초의 역사기록은, 고려시대 중엽인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자신의 저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란 문집에 <가포육영(家圃六詠)>이란 시를 지어 실었다. 텃밭에서 가꾸는 오이·가지·순무·파·아욱·박 등 여섯 가지 채소에 대해 읊은 시다.

-‘순무를 장에 넣으면 한여름에 먹기 좋고 / 소금에 절여 겨울에 대비하네 / 땅 속의 뿌리 커지고 / 서리 맞은 무 칼로 베어 먹으니 배 맛이 나네.’라고 읊었다.
즉, 제철 순무를 장에 넣고(장아찌를 이름) 소금에 절여서(김치) 여름과 겨울에 먹었다고 했으니, 말하자면 장아찌와 김치라는 저장음식과 겨울철에 대비하는 이른바 김장풍습이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게 한다.

조선조 말엽 순조 때인 1816년 다산 정약용의 둘째아들인 정학유(丁學游, 1786~1855)가 지은 <농가월령가> 10월령에도 김장담그기 모습이 그려져 있다.- ‘무, 배추 캐어들여 김장을 하오리라 / 앞 냇물에 깨끗이 씻어 소금 간 맞게 하소 / 고추, 마늘, 생강, 파에 조기 김치 장아찌라 / 양지에 움막 짓고 짚에 싸 깊이 묻고…’

이것으로 미뤄보면, 19세기에는 이미 김장이 사회계층과 관계없이 매우 보편화 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삼국시대부터 김치를 담가먹었다고 하지만, 소금에 절인 형태여서 지금의 김치와는 겉모양부터가 사뭇 달랐다.
배추김치의 주재료인 고추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이 16세기 임진왜란 무렵 일본을 통해서였고, 속이 꽉 들어찬 통배추는 18세기 중엽 중국에서 전래됐다.

이 통배추를 우리 땅 곳곳에서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고춧가루·마늘·생강·파·젓갈의 5가지 양념재료를 섞어 버무려 발효시키는 방식의 배추김치가 일반 민가에 퍼져나갔다는 것이 우리 김치의 역사다.
그 독특한 민족 고유의 식생활문화 형성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에 김치가 ‘김장, 김치를 담그고 나누는 문화’라는 다소 장황한 타이틀로 유네스코 인류무형 문화유산에 올랐고, 세계 통용 영문명 표기는 ‘김치(kimchi)’로 등록됐다.

# 그런데 최근 김치를 놓고 이변이 생겼다. 지난 11월24일 중국의 김치 제조방식이 국제표준화기구(ISO)의 승인을 받아 ‘국제표준’이 됐다고 중국 관영매체가 자랑스럽게 보도했다.
말하자면, 중국 김치가 국제 김치시장의 기준이 됐다며, ‘한국의 굴욕’이라고까지 의기양양하게 보도했다.

이제껏 국제기구에 중국이 국제표준에 의거해 등록한 김치는, 중국식 염장(鹽藏, 소금으로만 절여 만드는 것) 채소인 ‘파오차이(泡菜, paocai)’ 다. 중국에서는 한국식 김치와 중국식 김치를 통틀어 ‘파오차이’라고 부른다.

특히, 한국이 김치를 중국에 수출할 때 한국김치에 해당하는 별도의 기준이 없어 파오차이 기준을 적용시켜 왔던 것도 오명을 뒤집어 쓰는 단초가 됐다. 아무리 한국 김치가 김치종주국으로서 세계 김치의 표준으로 인증돼 있다고 한들 파오차이의 기준을 따르는 한, 수출시장을 저들에게 빼앗기는 것은 물론, ‘한국 김치는 파오차이의 모방품’이라는 저들의 전략적인 평가절하 비아냥과 이미지 훼손을 피해가긴 어렵다.

이젠 먹을거리 하나에도 국가적 ‘힘의 논리’가 우선해 적용되는 게 세계사회의 인식이고, 인심이다. 김치 하나에도 나라의 격(格)이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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