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수필-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붉은 흙덩이 떨구며
땅을 갈아엎는 농기계
소리에 흥이 났었지..."

지나간 봄, 화창한 기억의 꽃밭. 우리는 새벽안개 속에 떠있는 다리 위를 지나다녔었지. 다리 아래 얼음장 밑으로 수상한 푸른빛이 감돌면 감탄사를 연발하며 설렜었지. 보일러를 켠 따뜻한 방안에서 담요 한 자락 덮고 하얀 종이를 만지고 있으면 부러울 것이 없었지. 콧등이 시큰거려 내다 본 창밖으로 눈발이 하얗게 손 흔들며 내려와 글썽글썽 녹고 있었지. 분홍색 발목으로 아장거리며 우리 앞을 지나는 산비둘기, 뭉치로 날아오르는 참새떼. 봄을 마당에서 키웠었지. 무당벌레처럼 동그랗게 부풀어 오르는 꽃망울에 내 마음도 부풀어 올랐었지. 봄을 핑계 삼아 강물 따라 걸으면 여린 풀잎들은 파랗게 일어나고, 버들강아지는 노랗게 물들어 있었지. 아지랑이 풀어놓은 길엔 봄꽃도 아른아른 피어올랐었지. 3월은 그렇게 겨울로부터 풀려나는 자유였었고 그대로 가난한 이들의 희망이었지. 길 위에 붉은 흙덩이 떨구며 땅을 갈아엎는 농기계 소리에 흥이 났었지.     

속이 메슥거려 커피를 대접으로 탔다. 한 잔으로 마시기엔 부족할 듯해서. 둥글넓적한 대접 안에 짙은 갈색의 용액이 내 얼굴을 거울처럼 환히 비춘다. 마시려고 입술을 더 가까이 들이댈수록 부은 눈두덩이 위로 굵게 난 쌍꺼풀과 눈썹 사이 미간에 세로로 패인 주름과 눈 아래로 난 자잘한 주름들의 음영이 선명하다. 내가 이렇게 생겼었나~ 거울도 자주 보지 않는 요즘 주름진 낯선 여자 하나와 커피를 마주한다.

지금이 봄인지, 겨울인지, 아침인지, 저녁인지... 내내 뿌연 안개로 뒤덮여서 우린 어디로 가고 있는지 길을 잃은 채, 알 수 없는 것들에 꽁꽁 묶이고 갇혀서 꼼짝을 할 수가 없다. “무슨 잘못을 했는지 그 벌을 같이 받읍시다.”
눈이 녹아내리고 떠도는 달, 달빛도 아무 소용이 없다. 슬픔을 벗어버릴 수가 없다. 어둠을 벗겨내는 여명의 아침도 슬프고 한낮의 따스함도 내 슬픔을 거둬가지 못한다. 즐겨봤던 TV드라마와 오락프로그램을 봐도 나는 더 슬퍼지고 목 놓아 우는 저녁이다.

내 슬픔은 나를 떠나지 않는다. 어떻게 이렇게 속속들이 슬프단 말인가. 사랑하던 부모가 자식의 손을 놓아버리고 영영 떠나버린 것처럼, 부모 잃은 어린 것이 제 부모를 찾아 울며 헤매듯, 어떤 것도 내 맘을 달래지 못한다.

인간관계의 줄이 다 차단되고 모두가 격리됐다. 가끔 한낮에 핸드폰이 울리면 보험 들라는 목소리, 태양광 설치하라는 소리, 선거 여론조사 기관의 녹음된 메시지. 모두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들판을 지르는 늙은 바람 아득한 언저리 뿐. 커튼을 닫아 풍경을 거절하고 돌아서 스스로 차단해 버린 두어 평 방안에서 수인(囚人)처럼 그 벌을 받는다.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멈추지 않는 눈물로 애가(哀歌)를 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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