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 수필가 박애란

1960년대 수원시 서둔동에 있던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재학생들은 중학교에 못 간 학생들을 모아 서둔야학을 열었다.
야학 교사들은 가난에 찌든 야학생들에게 영어, 수학보다 사랑을 먼저 가르쳤다. 1968년 서둔야학 3년의 중학과정을 마친 박애란 작가는 고교검정고시와 교사자격을 취득하고 임용시험에 합격해 교단에 섰다. 31년의 교사생활을 마친 박애란 작가는 올 1월에 야학 교사로부터 받은 헌신과 사랑의 내용을 책에 담은 ‘사랑하나 그리움 둘’을 펴냈다. 그리고 평생토록 잊혀지지 않는
야학 교사들의 뜨거운 제자 사랑의 내용을 영화로 제작하는데 열정을 쏟고 있다. 박 작가로부터 서둔야학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봤다.

 “야학선생님들이 돈모아 교사 짓고
 제도권 정규교육 앞서는 감동교육으로
 서둔야학을 ‘영혼의 성지’로 이끌어”

1960년대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서둔야학’에서 공부

“1960년대 우리는 모두 가난했습니다. 아버지는 건축 청부업자였으나 일거리가 늘 있는 게 아니었고, 돈은 벌어도 밖에 나가 쓰는 일이 많아 가족들이 굶는 때가 많았어요. 어느 날 엄마가 빈 솥에 물을 가득 붓고는 한참 불을 지피셨어요. 이웃에게 밥 짓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지요. 초등학교를 마친 1963년 가을, 저는 남의 집 빨래를 해주던 엄마에게 ‘엄마 나 내년에 수원여중 시험을 볼래요’ 했더니 ‘그러다가 붙으면 어떡하려고’라는 말씀에 절망을 했던 저는 1964년 서둔야학에 갈 수밖에 없었어요.”

수업료 없이 공부…
교사들 감동적 교육이 애국혼 키워

서둔야학에서는 수업료를 한 푼도 받지 않았다. 교육 자재인 백묵, 칠판, 시험지는 야학 선생님들 몫이었다.
1965년 봄, 계사를 수리해서 교실로 쓰다가 다시 지었다. 학교 건축경비는 23만 원으로 당시 서울대 농대의 한 학기 등록금이 1만 원이던 시절이니 엄청난 거금이었다. 이 큰 돈을 선생님들이 십시일반 모은 것이었다.

처음엔 가마니 위에 멍석을 깔고 공부했다. 1967년 야학 교사들은 의자와 책상도 농대 목공실에서 내준 헌 목재를 가지고 손수 만들어줬다. 이러한 선생님들의 정성스런 돌봄으로 학교가 운영됐다.
선생님들은 중학과정 교육과 함께 우리 역사에 찬란한 족적을 남긴 훌륭한 선인들의 일화와 민족 얼을 일깨워 주셨다.
국사를 가르쳤던 조용민 선생님은 변영로의 ‘논개’, 한용운의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같은 명시를 칠판에 적은 후 감동적인 설명으로 학생들의 애국혼을 일깨웠다.

야학교사들은 농대에서 개최하는 연극과 음악공연을 학생에게 보여주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면서 학생들에게 문화예술의 눈을 뜨게 했다. 교실 벽에는 푸쉬킨의 ‘삶’이란 시와 맥아더 장군 부모님의 ‘기도문’이 붙어 있었다.
“저는 이런 감동어린 글을 부지런히 머리에 집어넣었습니다. 교단에 서면서 제자들에게 낭송을 해주기도 하고, 제 자신이 힘든 때는 그 시를 외워보기도 합니다.”

떠드는 학생 체벌보다
선생 자신의 팔목 때리며 선도

야학수업이 끝나는 밤 교사들은 야학생들이 위험하다며 꼭 집까지 데려다 주셨다. 야학교사와 야학생들은 ‘고향생각’, ‘바위고개’ 등 우리 가곡과 ‘스와니강’, ‘금발의 제니’ 등의 미국민요를 함께 부르며 귀가했다. 특히 인천문화연구원을 운영하며 테너로 활동 중인 황건식 선생님은 서둔야학의 교가를 작사하고 서울대 은사님께 작곡을 부탁해 학생들이 힘차게 부르게 해주셨다.
늦은 밤 최언호 선생님이 과학 수업을 하는데 뒷쪽 남학생들이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떠들었다. 이때 선생님이 “조용히 해요”, “조용히 해요” 타일렀으나 듣질 않았다.

최 선생님은 회초리를 가져와 자신의 팔목을 힘차게 때리셨다.
“내가 너희들을 잘못 가르쳐 그런 것이니까 내가 맞아야 한다”며 회초리를 계속 치셨다. 매맞은 자리가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한순간에 일어난 일로 학생들은 선생님께 열심히 사죄했고, 결국 선생님과 학생 모두가 함께 울었다. 이후 최언호 선생님은 서울여대 식품과학과 교수가 됐다.
“저는 선생님들의 이런 제자사랑과 헌신에 감격해 교사의 꿈을 갖게 됐고 의지를 굳게 다졌습니다.”

야학선생 대다수
교수와 전문요직에서 활동

한편, 야학선생님들은 제도권의 정규학교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교육과정을 운영했다.
교지(校誌)를 1년에 한 번씩 발간했다. 교지에는 학생들이 지켜나갈 삶의 지표가 될 선생님들의 좋은 글들이 실렸다. 학생들이 쓴 시와 수필도 실렸다.
학예회도 1년에 한 번씩 개최했다. 학예회를 하는 날에는 온통 잔치 분위기로 들썩였다. 이날 홈커밍데이(Home coming day) 행사로 학교를 거쳐 간 교사와 졸업생이 많이 모였다. 서둔야학 선생님들 중에는 서울대, 연대, 고대를 비롯해 여러 대학에서 교수로 봉직하고 계신 분들이 많았다. 그 밖에 KBS, 한국일보, 주택은행 등 여러 직장에서 요직들을 맡고 계셨다.

졸업생 중 영국유학 뒤 대학총장 된 이도…
“야학 졸업생 중에도 많은 분이 좋은 직장을 찾아갔지요. 그중 용인시 도서관장을 퇴직한 신현국 동문은 서둔야학을 일러 ‘내 영혼의 성지’라고 추억하고 있더라구요. 저의 후배 서명수씨는 서둔야학을 마치고 검정고시로 고교진학 뒤 연세대학교를 거쳐 영국으로 가 박사학위를 취득, 현재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장직을 맡고 있지요.”
소풍은 봄, 가을 두 번을 갔다. 소풍날은 언제나 즐거웠다. 몸이 아팠던 명희는 쉬엄쉬엄 걷는것도 힘이 들었다. 이때 조용민 선생님이 명희를 업고 학교에서 칠보산까지 왕복 20리 길을 걸어서 함께 소풍을 갈 수 있었다. 등가죽과 배가 맞붙을 정도로 깡 마르신 조 선생님의 뜨거운 제자사랑을 보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었다.

박애란 작가는 교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23살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한국방송통신대 농학과에 입학, 1979년 교사자격 취득에 이어 공립학교 임용고시에 합격했다. 그는 안일여자종고, 평택여고 등에서 31년 간 교사생활을 했다. 평택여고 재직 중에는 제자들에게 문학과 음악으로 감동교육을 실천하기도 했다.
특히 학구열이 강했던 제자에게 캐나다 유학을 권유해 캐나다 외교관과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도 했고, 의대 진학을 권유해 서울대 의대에 합격해 의사가 된 제자도 있다.

박 작가는 지난해 서둔야학스토리를 영화로 만들어 국민에게 널리 알리고자 방송대학 미디어영상학과 3학년에 편입해 내년에 졸업할 예정이다. 영화제작은 서둔야학 교사인 안병권 동영상제작자와 여러 학우의 도움을 받아 진행할 계획이라고 했다.
박 작가는 인생 후반기에 패션디자인, 발레, 글쓰기, 동영상 제작 등의 공부를 하고 있다. 최근엔 ‘문학의 강’이란 전문지를 통해 수필가로 등단 후 문인활동에도 분주하다고 했다.
이 모든 것이 50여년 전의 서둔야학 은사님들의 사랑과 열정에서 비롯됐다고 그는 덧붙여 말했다.

저작권자 © 농촌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