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자매네 반디농장 김영란의 전원일기(87)

젊은 날, 가슴 뛰게 하던 
정의감이 녹슬고 무뎌졌는데
다시 내 가슴을 뛰게 했다. 
오랜만에 김영란과 마주했다.

일주일마다 쓰는 원고를 오늘은 차맛이 깊은 카페에 와서 써 본다. 한여름에는 얼음 넣은 차를 시원함에 마시곤 했는데, 이제 계절이 깊어가니 따뜻한 차 맛이 느껴진다. 창밖을 내다보는데 ‘초추의 양광’이라는 글귀가 떠오르며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는 안톤 쉬나크의 시구가 떠오른다.
젊은 날은 괜스레 삶이 슬펐던 적이 많았으나 이제는 더 이상 슬퍼하지 않는다. 현실을 부둥켜안고 살아내고 나니 설익은 감정으로 슬픔을 미화하던 그 감정조차도 사치란 것을 깨닫고 나서 현실 삶을 사랑하려고 노력했다.

지열이 이글거리던 한 여름에는 쳐다보고 싶지도 않던 아스팔트 도로가 가을빛이 내려앉으니 그윽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가로수의 나뭇잎들이 단풍이 들기 시작하고, 때 이른 낙엽들이 길가에 나뒹구는 모습이 가을이 벌써 깊어가는구나 싶다. 

적당한 거리에서 관찰자가 돼서 길거리를 바라보니 오가는 행인들도, 유영하며 떨어지는 낙엽도, 기운을 빼면서 해맑아진 나무들도, 나뭇잎들을 흔들어대는 바람도, 풍경과는 반대로 질주하는 차들도, 아름다운 풍경이 돼 창밖을 내다보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지나가는 행인을 바라보는 것이 특히 흥미롭다. 제각각의 표정과 동작과 옷차림, 입마개를 막고 주인과 산책하는 개... 창을 통해 바라보는 움직이는 풍경들의 변화가 재미있다. 영화를 보는 듯 아름답다.
적당한 거리감이 주는 감정의 객관화. 처음으로 조용한 카페에 앉아서 글을 써 보는데 몰입과 집중이 잘돼 좋다. 이래서 요즘 젊은이들이 스터디카페에서 작업도 하고, 공부도 하는지 이유를 알 듯하다.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도, 이완된 감정도, 마음을 조율해주는 잔잔한 음악도, 계절 탓에 맛이 더 깊어진 차 맛도, 조용한 카페에서 느껴보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나만이 있던 공간과는 다른, 사람 속에서의 자유를 느껴보는 경험. 가끔 일탈을 즐겨볼 일이다.

일하다가 쉼터에서 멍 때리며 쉬는 시간에는 의자에 앉아서 낮잠을 자기도 하고, 유튜브를 보기도 하는,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그 시간이 좋았는데, 오늘 카페에서의 호젓한 시간도 참 좋다. 지난 몇 달간 유기농 인증취소 문제로 머리가 너무 뜨거웠어서 잔잔한 사색이 어려웠는데, 오랜만에 쉼과 평안을 느낀다. 혼자가 돼 내면을 들여다봐야 힘이 생긴다.

싸워야 할 때, 물러서지 않고 잘 싸우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제3자의 경우에는 박수를 치게 되나, 사자후를 토해내는 당사자는 벼랑 끝에 선 절박감에 아득해지기도 한다는 경험을 했다. 
살다가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나를 곧추 세워서 당당히 맞설 용기가 절대 필요함을 깨달았다. 정의가 모호할 때, 정의를 외칠 수 있어야 함을 깨달았다. 올바른 것을 옳다고 말할 용기가 있어야 하고, 그름과 타협하지 않을 정의감이 있어야 함을 깨달았다. 젊은 날, 가슴 뛰게 하던 그 정의감이 녹슬고 무뎌졌는데, 다시 내 가슴을 뛰게 했다. 오랜만에 나다운 김영란과 마주했다.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조용히 명상을 곁들이는 시간이 나를 정리해준다. 창밖에 비치는 가을빛이 들뜨지가 않으니 풍경이 절로 사색하게 한다. 나 홀로 카페에 와서 향기로운 차를 마주하고, 나를 바라보는 시간을 가지니 나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저작권자 © 농촌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