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자매네 반디농장 김영란의 전원일기(74)

"몸으로 삶을 체득했다. 그
노동자의 삶이 배는 동안
나는 삶에 경건해지기 시작했다.
따로 기도가 필요 없었다."

어린 날은 책이 재미있어서 책과 뒹굴며 살았다. 청년기에는 집이 가난해져서 다른 세상으로 도피하듯 책을 읽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사회에 나오자,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빠져 나오지 않으면 살아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책을 덮었다. 사느라고, 살아낸다고, 현실에 적응하느라고, 책을 잊었었다. 내 삶이 소설이요, 난해한 시라며 책상머리에서 머리로 편집한 책들은 가슴을 위로해주지 못한다며 책을 멀리했었다.

이후, 온 몸으로 살아냈다. 몸으로 삶을 체득했다. 그렇게 노동자의 삶이 몸에 배는 동안, 나는 삶에 경건해지기 시작했다. 따로 기도가 필요 없었다. 땀 흘려서 일하고, 그 대가로 삶을 이어가고, 부모노릇을 하고...
다시 눈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책이 읽혀지기 시작했다. 책 속에 깊이 빠져 들지는 못해도 번잡해질 때, 한 구절의 글귀가 나를 가다듬어 줬다.

잊고 있었던 시인 류시화 씨를 페이스북에서 만나고, 그가 서귀포 어느 마을 바닷가 근처 귤밭 창고에서 집필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유명인을 동경해서가 아니라, 내 가슴을 위로해주는 글을 쓰는 시인이 궁금해졌다.

호기심이 동하면 기어이 보고 확인하는 나였지만, 공인인 그가 겪을 세간의 관심 때문에 부득불 은둔생활을 즐길 것이라고 짐작해서 우연히 만나지기를 바랐다. 사람의 세상과 천상의 세상 사이쯤에서 살 것 같은 시인을 속물인간의 눈으로 가늠하는 우(愚)는 범하지 않을 식견은 있기에. 때를 기다렸다.

그 때가 왔다. 류시화 시인이 신간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이라는 시집을 10년 만에 내고, 제주도 동네서점에서 팬사인회를 한다는 소식이 페이스북에 올라왔다.
그를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더욱 든 것은, 요 근래 선거투표를 하며 최선도 아닌, 차선도 아닌, 최악이거나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 정치현실에 넌더리가 나고 있어서 투표에 식상하고 있었는데, 그가 쓴 시 때문에 내 마음이 구원받아서였다. 혼란스런 내 맘을 진정시켜준 시 한 편.

             나는 투표했다
나는 잘린 가지에 돋는 새순의 연두색 용지에 투표했다
선택된 정의 앞에서는 투명해져 버리는 투표용지에 투표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와 ‘네가 틀릴 수도 있다’ 중에서
‘내가 틀릴 수도 있다’에 투표했다
‘나는 바다이다’라고 노래하는 물방울에게 투표했다

나는 별들이 밤하늘에 쓰는 문장에 투표했다
삶이 나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내가 삶에게 화가 난 것이라는 문장에,
아픔의 시작은 다른 사람에게 있을지라도
그 아픔 끝내는 것은 나에게 달려있다는 문장에,
오늘은 나의 몫, 내일은 신의 몫이라는 문장에 투표했다
-류시화 시 <나는 투표했다> 중

사느라고 닳아 없어진 감성을, 그가 오롯이 지켜내어 이런 시를 세상 사람들이 읊조리고 위로받게 해주느라 누구보다 외로운 건 아닐까? 그의 친구가 반딧불이고, 꽃이고, 휘파람새고, 물방울이기에 맑은 시를 쓸 수 있겠지.
나는 독자로서 멀리서 그를 바라보며 응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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