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예부터, 우리 민족을 흔히 ‘백의(白衣)민족’이라 일컬어 왔다. 흰옷을 즐겨 입었던 까닭이다. 하긴 저 옛날 농경사회에서 고급스런 윗질의 옷감을 접하기도 어려웠을 뿐더러 염색가공은 꿈도 꿔보지 못했을 터이니 자연 서민들은 자주 빨아 손질해야 하는 수고스러움에도 불구하고 광목이나 무명재질의 흰옷을 입을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 비경제성과 흰옷에 집약되는 헤어날 길 없는 숙명 같은 과도한 부녀자의 노동에도 불구하고 유별나게 흰 옷에 집착하는 한국인의 성향을 곧 민족성향으로 미화시켜 일제시대 초기에는 그 흰 옷에 도사린 민족정신을 말살시킨다 하여 무단으로 흰 옷 착용을 금지시키기도 했었다.
이러한 우리 서민의 복식에 일대 혁명적인 개량작업이 이루어져 자유복장시대로의 탈바꿈에 물꼬를 튼 건, 우리나라 최초의 여학교로 1886년 문을 연 이화학당이었다.

오갈 데 없는 고아들 네명으로 시작한 이화학당에서 이들 여학생들의 옷을 통일해 입히기로 하고 고안해 낸 것이 바로 교복이었는데, 아래 위 치마저고리를 붉은색으로 한, 적이 대담한 것이었다.
이 붉은 색 제복은 대단히 이색적이어서 기숙사 담 너머로 행인들이 이 붉은 제복의 여학생들을 신기하게 여기며 넘겨다보기 일쑤였고, 그럴 때마다 여학생들이 후다닥 도망가 숨는 해프닝이 자주 벌어졌다.
이 일은 여성 해방이라는 상징적 깨우침과 학생들의 심리적 규제를 꾀했던 학당 측의 저의가 깔려 있었는데, 차츰 양가집 아가씨나 나이 든 며느리, 과부가 입학 해 다니게 되자 강제성을 지탱할 수 없어 개교 후 10여년간 지속된 붉은 교복은 옥색치마에 흰 저고리로 바뀌었다.

그 이전 왕조시대에는 일반 상민들과 구별시키기 위해 권번의 기생들에게 치마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다홍치마를 입게 했고, 문가에는 붉은 초롱의 ‘홍등’을 내걸게 했다.
그 적도 아닌 최근, 부산의 한 개점 쇼핑몰에서 난데없이 ‘빨간속옷’을 사려는 인파로 북새통을 이뤄 개점 하루만에 빨간 속옷 란제리가 6억원어치나 팔렸다고 한다. 빨간 속옷을 입거나 사두면 액막이 부적같이 재물운과 행운이 동시에 깃든다는 이 지방 특유의 속설 때문이라는 것. 부산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의 도서지방에서는 만선이 된 고깃배가 포구에 들어올 땐 어김없이 빨간깃발을 꽂고 돌아온 데서 연유한 속신이다.
이를 교묘하게 포장해 내세운 판매업체의 상술도 그렇지만, 맹목에 가깝게 그곳에 몰려가 몸싸움을 벌여가며 속옷구입에 열올린 고객(대부분 여성고객)모두 물신(物神)에만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아 왠지 씁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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