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간특집 - 농정원로의 발자취 : 다방면에서 업적 남긴 김영진 박사

“서울농대 2학년 때 농촌진흥청의 전신인 중앙농업기술원과 농사원에서 아르바이트로 참깨 육종연구를 도왔어요. 참깨 인공수정은 꽃이 필 때 해야 하는데, 참깨 꽃은 밤 12시가 지나야 피니 한밤중까지 기다려야 했죠. 수꽃이 피면 이를 따내고, 암술에다 다른 품종의 꽃가루로 수분을 해주느라 잠을 못자 고생했던 생각이 나네요.”
농촌진흥청 아르바이트를 시작으로 농림부,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어촌진흥공사, 국무총리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 등 주요 농림기관의 요직을 거치며 다방면에서 혁혁한 공을 남긴 김영진 박사. 그가 걸어온 파란만장한 길을 되짚어본다.

 

 알바로 시작해 농림기관 요직 두루 거치며
 한국농업 발전역사 곳곳에 큰 족적 남겨
“최선을 다하면 주위에서 자연스레 인정”

기술고시 합격해 농림부서 공직 시작
김영진 박사는 농촌진흥청에서 2년 일하다가 1957년 기술고시에 합격해 농림부 수습행정관으로 들어갔다.
“서울농대 은사였던 농정국장님의 권유로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에서 사료작물을 공부하고 돌아와 작물시험장에 배치 받았습니다. 조직이 농사원에서 농촌진흥청으로 확대되던 때여서 진급도 빨랐죠.”

작물시험장에서 일한 지 얼마 안 된 34세 어린나이에 서기관으로 승진한 그는 농업공무원교육원의 교수가 됐고, 교수 재직 중 농진청 지역시험과장으로 발탁됐다. 이후 얼마 안 돼 다시 농림부 잠업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는 양잠제품 수출액이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의 50%를 차지하던 때였다. 이에 고 박정희 대통령은 잠업을 중시해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하여금 진두지휘하게 했고 예산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일본 누에고치의 실 길이는 1200m인데 비해 한국산 누에는 800m에 불과해 일본 누에품종 도입이 시급했어요. 이에 일본 동경고등잠사학교 출신인 서울농대 교수를 앞세워 동기생을 통해 일본 누에품종을 비밀리에 들여오느라 애썼죠. 농민들의 양잠 독려를 위해 누에고치 가격을 높이 책정해주다보니 제사업자들로부터 수출이 어려워졌다는 불평도 들었죠.”

잠업 증산에 힘입어 생사(生絲) 수출이 늘어나면서 서울생사검사소의 업무량에 부하가 걸리자 부산에도 생사검사소가 신설됐고, 김 박사는 부이사관으로 승진하며 부산생사검사소장으로 부임했다.
그 무렵 박정희 대통령이 호주를 방문해 그곳의 푸른 초지와 젖소 방목을 목격하고 돌아와 국내에서 축산진흥과 초지 조성을 강력히 추진했는데, 1년간 미국에서 초지를 공부한 덕에 김 박사는 농림부 축산국장으로 발탁됐다.

농경연 폐지 막고 원장에 오르기도...
“초지 조성은 한 번에 되는 게 아니라 2~3년마다 보식해야 하는데, 예산사정으로 보식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다보니 감사원 감사에 걸려 문책을 받기도 했어요.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자금과 일본의 청구권 자금으로 미국 젖소를 들여와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젖소를 지원하고 우유 판매대금으로 상환 받는 젖소 보급사업은 남아도는 우유를 한강에 버린 것이 신문에 대서특필돼 곤욕을 치르기도 했죠.”

여러 우여곡절 끝에 그는 식산차관보로 승진했고, 이어 농산차관보로 발탁됐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김 차관보는 농림부를 떠났다.
어릴 적부터 서당 훈장이셨던 증조부로부터 한문교육을 집중적으로 받았던 김 박사는 농림부 재직 시 지방출장 때마다 농업고서를 모아 국내 최다 수장자로 소문이 났었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서 김 박사에게 한국농업사의 체계적인 정리 작업을 맡기려고 초빙연구원으로 발탁했다.

농경연 근무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 농경연을 한국개발연구원에 편입시킨다는 첩보를 접한 김 박사는 ‘세계적으로 농촌경제연구원이 없는 나라는 없다’라는 당위성을 내세워 청와대 관계자들을 설득했고, 결국 농경연 폐지를 막아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안 돼 김 박사는 농촌경제연구원장의 자리에 오르게 됐다.
“원장 재직 시 한국농업사 정리 작업에 앞서 232종에 이르는 농업고전의 해설집을 농업사 연구자료로 엮어 출간했습니다. 6년간 원장으로 있으면서 한국농업사 가이드북을 편찬한 것이 큰 보람이었죠.”

농어촌진흥공사 사장 재직 3년간
외압과 민원을 온몸으로 막아내

김 박사는 농촌경제연구원장을 마치고 1990년 농어촌진흥공사 사장으로 발령받았다. 그는 농어촌진흥공사 사장 재직 시 신규로 농지규모사업을 추진했고, 소농의 도시 진출을 돕는 농민직업훈련사업도 계획했다. 또한 농촌 정주인프라 개선을 위한 ‘한국농어촌공사 및 농지관리기금법’을 발의해 통과시키기도 했다.

이 법이 통과돼 조직이 확대되면서 각 당의 취업 외압이 거셌다. 김 박사는 옷을 벗을 각오로 사표를 옷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외압을 막느라 무진 애를 썼고, 끝내 공개채용시험을 치러 이를 차단했다. 군지부 신설에 따른 지역 국회의원의 외압도 온몸으로 막아냈다. 대규모 국책사업이었던 새만금 간척사업의 공사비 확보와 어민 보상 등 그가 사장으로 재직하던 3년은 각종 외압과 민원의 연속이었다고 회상했다.

김 박사는 농어촌진흥공사 사장직을 마치고 충남대학교 초빙교수로 자리를 옮겼다가 연간 연구비가 1조 원에 달하는 국무총리실 산하의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에 취임했다.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김 박사는 우수 논문 시상과 이를 근무평점에 가산점을 주는 제도를 시행해 연구 분위기를 일신했고, 연구 열의가 고조되면서 이는 훌륭한 연구성과로 이어졌다고 한다.

2002년 퇴직을 앞두고는 내부에서 이사장 연임운동이 일어났지만 그는 72세의 고령임을 감안해 연임을 사양했다. 김 박사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고 공직을 명예롭게 떠났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농민들과 후배 공무원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코로나19로 외국인 노동자들의 입국이 차단돼 농촌 인력부족 문제가 심각합니다. 농민 여러분은 코로나19가 종식될 때까지 어렵더라도 잘 버티고 위기를 극복해 농촌을 잘 가꿔주길 바랍니다. 기후변화에 대응해 과학영농과 첨단농업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스마트팜을 통해 소득을 창출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후배 공무원들도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 훗날 유익하게 쓰이고 자기성장에 좋은 밑거름이 된다는 점을 반드시 명심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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