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간특집 - 농정원로의 발자취 : 평생 축산인으로 살아온 김강식 박사

"국내 한우사양기술 개발과 
축산진흥기금 조성에 큰 역할
축산물 수출 확대에도 족적"

“서울농대를 졸업하고 군 제대 후 첫 직장으로 경기도 안양종축장에 촉탁직으로 들어갔습니다. 축산인으로 성공하고 싶었죠.”
출근 첫날 종축장장은 직원들을 소개한 후 김 박사를 계사에 배치하겠다며 이튿날 아침 일찍 계사 앞으로 나오라고 지시했다. 주임으로부터 업무지시를 받아야 하는데, 장장이 계사로 나오라는 애기에 많이 당황하고 의아했다.
“아침 6시에 계사에 나갔더니 장장님이 닭똥을 긁어모을 쇠갈퀴와 빗자루, 닭똥을 담을 삼태기를 주며 홰에 올라간 닭 400수를 손전등으로 비쳐 닭똥 이상유무를 관찰하라고 하더군요. 처음엔 장장의 지시에 거부감이 들었지만 닭똥의 분변을 관찰하고 기록하라는 지시가 축산연구인의 자세를 제시한 것으로 이해하고 열심히 했죠.”

두 달간 매일 닭 5천수의 개별 인식표를 보며 산란 상황을 확인하고, 개체별 월간 산란개수를 기록했다. 이후에는 병아리 암수를 감별하는 기술도 습득했다.
“말단 촉탁직에게 이론보다 실습 위주의 연구방법을 제시하고, 연구인으로서 나아갈 덕목과 신념을 제시해 준 장장님이 평생 감사하고 잊지 못합니다.”
김강식 박사의 축산인생 시작은 이렇게 시작됐다.

농사원 발족과 농업연구직 첫발
김강식 박사는 1957년 농사원(농촌진흥청 전신) 신규 채용에 합격해 안양종축장 촉탁생활을 마감했다. 1958년 1월 농사원 시험국 연구조사과에 농업연구사로 발령받은 그는 산하 시험연구기관의 연구결과를 분석하고 이를 농림시책이나 지도사업에 반영하는 일을 했다. 이후 농사원이 농촌진흥청으로 확대 개편되면서 연구사 생활 4년 만에 승진시험에 합격해 연구관으로 승진했다. 그의 나이 29세 때다. 

행정업무를 보면서도 그는 축산연구에 대한 미련은 여전했다. 영양생리과장 자리로 옮기고 싶었지만 연구 경험 부족이 발목을 잡았고, 결국 그는 해외연수의 길을 택했다. 
해외연수 과제는 한우의 초기 발육부진에 대응한 사료개발 연구를 목적으로 했다. 대상기관은 언어소통이 어느 정도 가능한 일본 농림성 산하의 축산시험장으로 정하고, 농림부에서 시행하는 해외연수 어학시험에 합격해 일본연수가 시작됐다.

1967년 10월, 일본 축산시험장 영양생리부에 배치돼 한우송아지 발육 부진과 볏짚 급여수준에 따른 사료소화율, 반추위 내 저급지방산 생성 등을 연구하기 위해 동물실험을 통해 볏짚의 사료화 방법을 시험했다. 연구결과를 이듬해 일본 축산학회에서 발표했고, 생애 처음으로 일본 축산학회지에도 논문이 게재되기도 했다.

해외연수로 한우산업 발전에 큰 획
1969년 그는 일본연수를 마치고 귀국했다. 귀국 후 그가 원하던 영양생리과장 보직을 맡았다.
“막상 인공유 개발을 본격 추진하려 했지만 예산 부족으로 난관에 부딪쳤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농가의 도움으로 인공유 급여 시험용 송아지를 확보했고, 시험을 거쳐 비타민과 광물질, 항생물질이 함유된 인공유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이 인공유로 송아지를 12개월 사육했더니, 관행 사육 송아지에 비해 체중이 144% 증가하는 성과를 보였습니다. 15개월령의 관행 사육 소는 195㎏인 반면 육성비육우는 371㎏나 돼서 190%의 획기적인 증체 연구성과가 나왔습니다.”

그는 이러한 연구성과를 경제개발5개년계획 보고회에서 대통령을 비롯한 국무위원과 당직자, 경제단체대표 등 10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보고했다. 보고가 끝난 뒤 대통령은 김 박사의 연구성과를 직접 격려했다.

그는 대통령에게 짧은 해외연수 기간으로 인한 기술습득의 어려움과 언어소통의 문제 등을 개선해야 한다고 건의했고, 박 대통령은 이 말을 듣자마자 관계 장관들에게 직무발명보상법 제정과 포상, 농업공무원의 일본연수 중점, 인공유 생산 사료공장 건립, 일본어 제2외국어 채택 등을 지시했다.
인공유 개발 성공은 김 박사가 일본에서 연수한 후 영양생리과장으로 재직하며 3년 만에 이뤄낸 위업이었다.

행정과 연구현장에서 소신 펼치다 
이후 그는 농림부 축산국장으로 발탁됐다. 
“당시 농림부 총 예산 1200억 원 중 축산예산이 32억 원 밖에 안 되더군요. 그래서 장관에게 기금 조성 방안을 건의했죠. 도축장, 유업체 등의 수익 중 2% 정도를 축산진흥기금으로 갹출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경제부처에 건의해 60억 원으로 시작된 축산진흥기금은 이후 250억 원, 그리고 2천억 원으로 늘어나 초지 조성, 사료 생산, 방역, 유통시설 설치 등 축산생산 기반을 다지는 초석이 됐다.
1981년 김강식 국장은 농촌진흥청 축산시험장장으로 복귀했다. 역대 장장 중 최장 기록인 9년을 근무하면서 우리나라 축산·사료분야의 품종 개량과 사양·재배기술을 개발해 농가에 보급했다. 특히, 축산정책 과제에 새로 개발한 축산기술을 접목해 우리나라 축산업이 한 단계 더 도약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농진청 차장으로 임명돼 농촌진흥사업을 이끌다가 1993년 37년간의 공직을 마감했다.

“내 자료가 후배들에게 도움 됐으면...”
김강식 박사는 퇴임 후 한국육류수출입협회 창립 주역으로 활동하다가 1993년 회장으로 추대됐다. 회장으로 재직하면서 2천만 불이었던 우리나라의 돼지고기 수출액을 3년 만에 4억5천만 불로 늘려 한국 농산물 수출액 중 60%를 돼지고기 수출이 차지하는 큰 성과를 거뒀다. 일본 돼지고기 소비량의 50%이 한국산 돼지고기였을 정도다.

2007년까지 14년간 한국육류수출입협회장을 역임하다가 협회 고문 활동을 끝으로 45년에 걸친 축산행정 달인으로서 위대한 족적을 남겼다.
“우리 농업을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준 전국의 축산농업인과 관련 공무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축산인으로 살아온 걸 매우 뿌듯하게 생각합니다. 그동안 해왔던 축산사업을 정리해 ‘내가 걸은 60 성상(星霜)의 목장길’이란 책을 펴내 전국의 농업기술센터와 시험연구기관에 배포했습니다. 또한 일생동안 기록한 축산 장단기계획과 시책연구결과, 건의자료, 강의자료 등 방대한 자료를 농진청 도서관에 기증하기도 했습니다. 농업인과 후배 축산공직자들이 이 책과 자료를 보면서 한국 축산의 앞날을 보다 크고, 튼튼하게 발전시켜 나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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