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수필- 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애달복달은 간 데 없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남은 배봉지를 싸러 간다"

산을 내리덮은 운무가 산골짜기를 메우더니 마을 골목 어귀까지 막는다. 온통 안개가 시야를 내리눌러 답답하고 건조한 눈알처럼 뻑뻑하다. 농사꾼에게 농사란 하늘에 달려있다 보니 눈 뜨면 날씨를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된다. 특히 우리 같은 과수원에는 비가 잦으면 배나무약도 더 자주 쳐 줘야 되고, 비가 오면 배봉지를 쌀 수가 없어 미뤄둔 다른 일을 짬짬이 해야 해서 스마트폰을 이용해 비예보는 물론이고 비오는 시각과 시간, 바람세기, 강수량, 저온 여부 등의 정보를 확인해야만 한다. 

연중에도 가장 변화무쌍한 것이 여름 날씨고 예측하기 어렵다지만 요새 일기예보가 오락가락 제대로 잘 맞추질 못한다. 작년, 거의 두 달에 이르는 장마로 배나무의 한 해를 고스란히 잃어버린 기억이 있어 더 일기에 예민한지도 모르겠다.

올 4월엔 유난히 일찍 배꽃이 폈고, 5월에는 배솎기(적과)를, 연이어 6월에 배봉지 싸기에 돌입했는데, 그 사이 매실, 자두 익은 열매를 거두느라 며칠을 빼먹었더니 7월이 시작됐는데도 배봉지를 다 싸지 못했다. 우리에겐 장마가 좀 밀린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밤사이 비가 온대서 어제 미리 약을 쳤고, 하늘은 잔뜩 흐려있지만 웃비만 내리지 않으면 무조건 배를 싸야할 처지다. 오늘 남쪽엔 이미 장맛비가 쏟아지고 낼부터 여기도 본격적인 장맛비가 온다니 내일 비오기 전까지 배봉지 싸기를 끝내야하는 시간싸움이 시작됐다. 

비가 그친 아침, 배나무 전부가 젖어 있어 봉지 싸기가 쉽지 않다. 나뭇잎을 건드리면 물방울 세례를 받아 온 몸을 다 적신다. 사다리도 타야 하는데, 가벼운 알루미늄 사다리는 물에 젖으면 미끄럽다. 사다리를 타고 높은 가지를 싸는 남편 발밑에서 손이 닿는 낮은 가지의 배를 나도 싼다. 주먹만 한 배를 노란 배봉지(노루지) 속에 넣고 양쪽으로 봉지 주름을 잡아 오므려서 옆면에 붙은 핀으로 배꼭지 자루부분을 감싸 눌러 묶어주면 되는데, 비숙련공인 나는 배봉지 주름을 잡아 모으다 너무 힘이 들어가 그만 배가 가지에서 톡 떨어질 때가 있다.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거다. 정신없이 하다 보니 어느새 날이 개나, 가지 사이로 언뜻 푸른 하늘이 보이고 미세먼지가 일도 없이 풀냄새 싱그럽다. 불어오는 바람이 젖은 나무를, 땀에 젖은 일꾼을 말린다.

하늘은 금방 개다 흐렸다를 반복하고 조바심 끝에 마지막 줄 끝에 세 그루 남겨놓고 배봉지를 싸온 곳을 뒤돌아보니 배밭엔 이미 다 익은 노오란 배로 가득 찬 듯하다. 바람이 불어 황금색 배봉지가 물결처럼 출렁일 때, 나는 우리 대학시절 1970~1980년대에 유행했던 팝송이 절로 흘러나왔다. ‘타이 어 옐로 리본 라운드 디 올 오크 트리’(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d oak tree). 이 노랫말의 줄거리가 감동적이어서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된 것으로 안다. 혹자는 배경이 미국의 남북전쟁 때라고 하는데, 이 노래 가사엔 감옥에서 3년을 복역한 기결수가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 승객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아내가 아직도 날 용서하고 사랑한다면 집 앞 떡갈나무에 노란 리본을 매달아달라고 했소. 만약 노란 리본이 없으면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지나가겠소.” 가슴 졸이던 승객들은 마침내 노란 리본이 가득한 떡갈나무가 보이자 모두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하고 그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다.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노란 리본! 장마 전에 배를 다 못 쌀까봐 애달복달 하던 맘은 간 데 없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남은 배봉지를 싸러 유유히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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