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수필- 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눈 수술을 하고 나니
시력만 좋아진 게 아니다.
새벽안개가 그토록 푸른지
처음 알았다..."

들판을 가로 지르는 길가는 온통 옥수수밭이다. 옥수수가 어릴 때는 몰랐었는데 개꼬리(옥수수꽃)가 피뢰침처럼 솟아나오고 굵은 몸통, 2m 되는 큰 키에 줄지어 겹겹이 서 있는 것이 마치 부잣집 높은 초록 담벼락같이 웅장하다. 집집마다 자주색, 분홍색, 흰색의 접시꽃이 환하게 피고, 우리 동네 특산물인 감물감자축제는 어제로 벌써 끝났다. 묵정밭 개망초가 하얗게 피어 소금을 뿌린듯하다는 메밀꽃을 불러오고, 엊그제 모내기를 마친 논에는 어린 모가 땅심을 받아 새파랗다.

봄부터 병원(치과) 출입이 잦다보니 어느새 올해도 절반이 지나간다. 노안이어선지 화면이 흐리게 보여 안경을 바꿔볼까 하고 다니던 안경점에 갔더니 왼쪽 눈의 시력이 너무 떨어진다고 먼저 안과에 가보란다. 마침 다니던 치과건물에 안과도 있어 가서 검진을 하니 백내장이라고 수술을 권한다. 우리는 잠시 고민을 했지만 의사의 권유대로 수술을 했다. 거의 평생 안경을 썼는데, 수술을 하고나니 1.0의 시력이 나와 안경을 벗고 운전하며 다니게 돼 신통하기 그지없다. 물론 수술 후 보안경도 쓰고 감염에 주의해 안약도 넣고 병원에도 여러 번 가야 하지만 보이는 게 다르니 세상이 달라진 것 같다.

때마침 병원에서 코로나19로 인해 일 년도 넘게 소식이 끊겼던 지인을 만났다. 안압이 높아져 눈에 실핏줄이 터졌는데, 환자가 많아 대기시간이 길어지면서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며칠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단다. 그녀의 아버지는 교직에 계셨고 외모가 출중하시고 늘씬한 분이셨다. 근데 그녀의 어머니는 학력이 부족하고 키 작고 뚱뚱하고 억센 분이셨다. 부모님은 이혼했고 그녀는 엄마가 키웠다. 그녀 역시 엄마를 닮아 체격이 통통한 편이다.

그녀는 심한 외모 콤플렉스에 빠져 아버지가 만나자는 연락을 여러 차례 했지만 거절했다. 아버지의 훌륭한 외모에 못 미치는 자신을 멸시하며 살을 빼서 날씬해지면 아버지를 만날 거라 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녀의 콤플렉스는 자신을 더 편협하게 옭아맸다. 그러다 체중조절을 했다. 더 늦기 전에 아버지를 만날 결심을 하고 연락을 하던 차에 아버지의 부고장을 받은 것이다. 생전에 딸에게 쓴 장문의 편지가 든 상자 하나가 그토록 벼르던 아버지의 전부였다.

눈 수술을 하고 나니 시력만 좋아진 게 아니다. 새벽안개가 그토록 푸른지 처음 알았다. 가스레인지의 가스불빛이 그렇게 살아있는 남보랏빛인 것도 깜짝 놀랐다. 달빛도 별빛도 달라졌고, 빛과 색의 경계가 뚜렷하다. 모두 달라져 보인다. 다른 세상에 온 것 같다. 사람의 눈에 무엇을 끼고 사는가, 무슨 안경을 쓰고 보느냐에 따라 삶에 대한 해석이 180도 달라진다. 장 폴 사르트르가 “아무리 닳고 지워지고 모욕당하고 따돌림 당하고 묵살 당한다 하더라도 어린 시절의 온갖 특징은 50대 인간에게 그대로 남아 있다.”고 했다.

인간 내면 깊숙이 그대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게 유년의 흔적이다. 나이에 상관없이 지금의 ‘나’는 유년의 ‘나’에서 비롯된 것이란 말이다. 그녀가 좀 더 일찍 아버지의 화해를 받아 들였더라면 눈에서 피 터지는 후회는 없지 않았을까.
곧 검은 비가 장대처럼 쏟아지는 눅눅한 장마가 들이닥치겠지. 올 마지막 유월을 소리 내어 불러본다. 유순하고 둥근 뭔가가 입안에서 구른다. 끈끈한 더위가 오기 전에 이 둥그런 시간 속에서 맘의 모서리를 잘 보듬어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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