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의 트로트-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50> ‘밀리언셀러’ 음반들

▲ 울산에 재현된 고복수 거리

우리나라에서 음반이 보급된 건 일제 시대인 1920년부터다. 당시 조선총독부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가 ‘식민지 조선에서의 문화정책’을 내세우면서 그 홍보수단으로 레코드 음악, 즉 음반산업을 적극 장려했다.

이 무렵부터 일본에 본사를 둔 일본 레코드사들과 미국·독일의 레코드사들이 불꽃튀는 시장경쟁을 벌였다. 미국계 빅터레코드사와 콜럼비아레코드, 독일계 폴리돌레코드사와 일본계의 시에론레코드, 오케레코드, 태평레코드 등 소위 ‘6대 메이저급 레코드사’가 곧 그들이다.

이러한 초기의 메이저급 레코드사 체제는, 다시 신세기·오아시스·도미도·미도파·유니버살·킹스타의 6대 국내 음반사로 음반시장이 재편돼 음반산업의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했다.
이같은 음반산업의 활성화 속에서 우리의 대중음악-트로트도 양적·질적 풍요를 누리게 됐다. 그때의 ‘밀리언셀러’로 얘기되는 히트음반들은 당시 인구비례로 볼 때 지금의 100만 장 판매를 뜻하는 ‘밀리언셀러’ 그 이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스타가수들의 대우(당시에는 레코드사 전속제) 또한 상상초월의 최상급 대우를 받았다.

이제 하늘의 별처럼 떠올랐다 스러져간 1920~1950년대 대표적인 스타 가수들과 그들의 밀리언셀러 음반들을 시대순으로 살펴보자.

▲ 윤심덕의 <사의 찬미> 음반과 가사지

 

① 윤심덕 <사의 찬미>(1926)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매된 음반이다. 최초의 관비 일본유학생 출신 성악가인 윤심덕이 1926년 7월 일본으로 건너가서 취입한 <사의 찬미>는 이바노비치의 왈츠곡인 <도나우강의 잔물결>에 윤심덕이 가사를 쓰고, 동생인 윤성덕의 피아노 반주로 취입했다.

일본 오사카에 있던 일동축음기 주식회사에서 발매한 이 음반은 윤심덕이 그녀의 애인 김우진과 현해탄에서 동반자살함으로써 사회적으로 더욱 주목받으며 유명해져, 당시로서는 경이적인 10만 장의 음반이 판매됐다.

지금은 아주 극소수만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1926년 첫 발매음반은, 2015년 일본 야후 경매에서 5000만 원이 넘는 금액에 낙찰돼 한국대중가요 음반 중 최고가로 평가되고 있다.

 

② 고복수 <타향살이>(1934)
김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의 노래로 원래제목은 <타향>이다.
1934년 봄, 콜럼비아레코드사와 조선일보사 후원으로 개최한 전조선 명가수 선발음악대회에서 23세의 울산출신 고복수가 3등으로 입상하면서 가수로 데뷔했다. 그후 오케레코드사에 발탁돼 첫 취입한 노래다.

이 일로 해서 고복수는 ‘최초의 콩쿠르 출신 가수’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특별한 기교가 없는 고복수의 구수한 목소리와 창법이 많은 대중들의 호감을 샀다. 특히 만주·북해도 등지로 이민가 떠도는 동포들에게는 애절한 ‘망향가’였다. 곡은 짧으나 가사는 4절까지 있는 특이한 노래다.

 

③ 이난영 <목포의 눈물>(1935)
1935년 오케레코드사와 조선일보사가 공동으로 공모한 ‘조선10대도시 찬가-향토신민요 노랫말 공모’에서 당선작으로 뽑힌 문일석의 시 <목포의 사랑>에 손목인이 곡을 붙인 노래다.
노래의 타이틀을 <목포의 사랑>에서 <목포의 눈물>로 바꾸고, 애초 고복수에게 부르게 할 계획을 접고 목포출신 신인가수인 열아홉 살의 이난영에게 부르게 했다. 이 노래는 시중에 나오자마자 순식간에 5만 장의 레코드 판매고를 올리며, 신인가수 이난영을 가요계의 ‘샛별’로 급부상시켰다. 그리고 <목포의 눈물>은 조선반도 겨레붙이 모두의 노래처럼 번져나갔다.

어느 시인은, “마치 꽁꽁 앓는 듯한 콧소리 섞인 이난영 특유의 청아한 목소리에다, 흐느끼듯 애잔하게 애간장을 토막토막 끊어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난영의 목꺾기 창법이 고스란히 살아있다”고 평했다.

 

④ 황금심 <알뜰한 당신>(1938)
열여섯 살에 가요콩쿠르에서 당당히 1등을 차지한 황금심을 눈여겨 본 작사가 이부풍과 작곡가 전수린이, 자신들의 소속사인 빅타레코드사로 황금심을 끌어들여 취입시킨 노래다.
황금심 일생일대 최고의 히트곡. 흡사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듯한 낭랑, 청아한 목소리에 교태기가 흐르는 황금심의 노래는 말 그대로 ‘하늘이 내려준 천상의 목소리’였다. 이 노래 이후 황금심에게는 ‘꾀꼬리의 여왕’이란 별명이 붙었다.

당시 시중에서 유성기 있는 집과 라디오에서는 황금심의 노래가 쉴 새 없이 수돗물처럼 흘러나왔다. 1959년 1월23일자 <동아일보>에서는 ‘백만인에게 불린 흘러간 옛노래’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 김정구의 <왕서방 연서>와 더불어 황금심의 <알뜰한 당신>을 소개하기도 했다.

 

⑤ 김정구 <눈물젖은 두만강>(1938)
함경남도 원산 명사십리가 고향인 김정구가 1938년 발표한 이 노래가 크게 히트하면서 김정구라는 이름을 전국에 알리며 전국구 가수가 됐다. 특히 이 노래는 1960년대 KBS라디오 5분(한낮 12시55분~1시)연속 반공드라마 <김삿갓 북한방랑기>의 시그널 주제곡으로 20년 넘게 방송되면서 전국민 애창 트로트곡이 됐다.

이 노래는 다른 그 어느 노래보다도 북녘땅에 고향을 두고 온 실향민들과 이산가족들에게는 절절한 눈물어리는 망향가이기도 하다.

 

⑥ 김영춘 <홍도야 울지마라>(1939)
이 노래는 본래 1936년 7월 한국 최초 연극전용 상설극장인 동양극장 전속 청춘좌극단이 무대에 올렸던 신파비극인 악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전 4막5장)에 삽입됐던 노래다.
이 악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광복 이전 한국 연극사상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밀리언셀러 음반 판매기록을 세우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노래를 부른 가수 김영춘의 다소 세련되지 못한 가창력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의 음반이 베스트셀러가 된 데에는, 비극·비련의 여주인공인 기생 홍도의 신파적 서사 스토리가 큰 몫을 했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는 저항가요로, 이후엔 서민들의 젓가락 장단에 실려 고달픈 삶의 애환을 달래주는 대표적인 ‘옛 뽕짝’이었던 히트넘버다.

 

⑦ 백년설 <나그네 설움>(1940)
일제의 서슬 퍼런 압제하에서 실향과 방랑은 이 땅의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었던 커다란 아픔이었다. 그 아픔을 다독여 줬던 대표적인 노래가 이 노래, <나그네 설움>이었다. 재미있게도 대한노인회 회원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 1위로 꼽은 노래도 이 노래다. 지난 날의 서러웠던, 눈물 어린 삶의 기억들이 이 노래 한 곡에 실렸기 때문이어서일까.

백년설의 구성진 창법에 몸을 실은 <나그네 설움>은 시중에 나오자마자 폭발적 인기몰이를 하며 순식간에 앨범 10만 장 이상이 팔려나갔다. 이 노래는, ‘1945년 광복 이전 음반판매량 최다(10만 장)’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⑧ 현인 <비 내리는 고모령>(1947)
고향 그리는 정, 어머니를 그리는 애틋한 마음이 담긴 절절한 사모곡이다.
대구 수성구 만촌동에 있는 고개-고모령은, 일제 강점기 때 징병·징용에 끌려나가는 아들자식과 어머니가 눈물로 이별하던 고개였다는 내력이 전설처럼 전해온다.

1947년 작곡가 박시춘이 직접 설립한 럭키레코드사에서 찍어낸 <신라의 달밤>과 함께 히트가도를 달렸다. 작곡가 박시춘의 기타 솔로 반주에 얹혀 흐르는 가슴시린 말들-어머니·부엉새·맨드라미·물방앗간·망향초·산마루턱-이 아득히 가슴저며오는 눈물어릴 사모곡이다.
KBS 가요무대 방송 35주년 신청곡 집계순위에서 <찔레꽃>, <울고넘는 박달재>, <꿈에 본 내고향>과 함께 5위권 안에 줄곧 오르기도 했다.

 

⑨ 박재홍 <울고 넘는 박달재>(1948)
어수선한 전쟁통에 이 노래로 박재홍은 일약 톱스타가 됐다. 정감있는 그의 목소리와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 노랫말의 서사적 스토리가 고된 피난살이에 지친 실향민들을 다독이기에 충분했다. 박달재가 어디에 있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누구나의 가슴엔 따뜻한 고향, 자애로운 어머니와 형제들 모습으로 가득 차 있으므로.

“솔직히 난 박달재가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이 노래를 불렀어요. 그런데 끔찍한 전쟁이 터진 거에요. 그냥, 내가 이 노래를 부른 가수인 줄도 모르는 피난민들과 같이 <울고 넘는 박달재>를 부르며 부산까지 피난을 내려갔어요.… 그때를 평생 잊을 수가 없습니다.”
박재홍의 생전 얘기다.

 

⑩ 남인수 <이별의 부산정거장>(1954)
1950년대 음반 최다판매량 기록을 가지고 있다. 전후 피란지 부산의 풍광을 스케치하듯 그린 노래다. ‘하늘이 내린 반도의 목소리’,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미성의 가수’- 남인수의 1950년대 최대 히트곡이다.

뛰어난 가창력과 윤기가 나는 단단하고도 미려한 음성, 수려한 외모까지 스타의 면모를 두루 갖춘 그의 혜성같은 등장으로 우리 가요계는 이전의 스타들- 고복수·백년설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무대가 펼쳐졌다. 팬들은 새로운 스타 남인수에 환호했다.
<애수의 소야곡>으로 톱스타의 자리에 올라 20여 년을 독주하던 말기, 폐결핵으로 피를 토하며 부른 노래가 바로 이 <이별의 부산정거장>이다. 그는 이별의 기적소리와 함께 이 세상을 떠나갔다.

 

※ 독자께 알림: 지난 한 해동안 매주 연재해 온 <그 옛날의 트로트-노래의 고향을 찾아서>는 이번호 50회로 끝을 맺습니다. 그간 아낌없는 따뜻한 성원을 보내주신 애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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