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의 트로트-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49> 안다성의 노래들

“난, 지금도 잘나가는 노장가수!”
“여기저기 오라는 데 있으면 가서 노래하죠. 한 달에 한 번은 노장가수들 모임에 가서 이야기도 하고, KBS <가요무대>도 나가고… 일 년에 예닐곱 번 <가요무대>에 나갈 정도면 노장가수치고는 잘 나가는 것 아닙니까? 허허…”

▲ KBS가요무대 최근 출연 모습

수년 전, 한 종합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잘 나가는 노장가수’, 그것도 100세를 목전에 둔 91세의 현존 최장수 원로가수인 안다성(安多星, 1931~  )은, 지금도 현역이다. 무대에 서서 노래하는데 큰 무리 없는 성성한 노익장이다.
그런만큼 그는 자기관리가 철저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노신사’로 불릴 만큼 깔끔하면서도 흐트러짐 없는 차림새의 외모가 그렇고, 원창에 가깝게 노래를 부르려고 애쓰는 모습이 그러하며, 사회생활에서의 사람관계 또한 그러하다.

특히 그는 시간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하기로 유명하다. 누구든 만날 약속을 하면, 늘 깔끔한 정장차림으로 약속장소에 먼저 나와 기다린다.
“우리처럼 노래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미리 와서 기다리지 않으면 불안하다.”는 게 그의 변이지만, 그건 몸에 밴 습관이고, 상대에 대한 진중한 배려에서 비롯된 예의 같은 것이다.
노래도 그의 성격대로 깔끔한 클래식풍의 노래다. 6.25전쟁 이후 유행되기 시작한 스탠다드 팝 계열의 노래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본인의 취향은, 자신의 예명 작명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의 본명은 안영길. 예명 작명을 놓고 한참 부심하던 그는 당대 최고의 여성 알토이자 흑인영가 1인자였던 마리안 앤더슨(Marian  Anderson)의 맑고 깊은 영혼의 노래를 사모한 나머지 ‘앤더슨’과 가장 유사한 한글발음인 ‘안다성’으로 작명했다.

세미클래식풍인 그의 노래들은, 오랫동안 불리지만 폭넓게 두루 불리지는 않는다.
거기엔 ‘부르기 쉽지 않은~’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우리가요의 ‘고전’이라고도 얘기된다. 그의 대표 히트곡들인 <바닷가에서> <사랑이 메아리 칠 때>가 특히 그러하다.

 

▲ 히트앨범 <바닷가에서>재킷

          <바닷가에서>

 파도 소리 들리는 쓸쓸한 바닷가에
 나 홀로 외로이 추억을 더듬네
 그대 내 곁을 떠나 멀리 있다 하여도
 내 마음 속 깊이 떠나지 않는 꿈 서러워라
 아아아아~새소리만 바람타고 처량하게
 들려오는 백사장이 고요해
 파도 소리 들리는 쓸쓸한 바닷가에
 흘러간 옛날의 추억에 잠겨 나 홀로 있네

                          (1963, 박춘석 작사·작곡)

 

▲ 영화 <유랑극장> 주제가 모음 앨범. <사랑이 메아리 칠 때>, <바닷가에서> 등 8곡이 담겨있다.

세미클래식풍의 4분의 4박자 슬로 리듬인 이 노래는, 1963년 개봉된 강범구 감독의 영화 <유랑극장>에 삽입된 주제가였다. 영화에서는 주인공 배역을 맡은 영화배우 박노식이 불렀고, 직접 음반으로 취입하기도 했다.
본래 작곡가 박춘석과는 나이도 동년배인데다가 옛 신흥대학(현 경희대 전신) 영문과 동문이어서 박춘석이 안다성을 염두에 두고 노래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사랑이 메아리 칠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랑이 메아리 칠 때>

 1. 바람이 불면 산 위에 올라 노래를
   띄우리라 그대 창까지
   달밝은 밤은 호수에 나가
   가만히 말 하리라
   못잊는다고 못잊는다고 아아아아아아아~
   진정 이토록 못잊을 줄은
   세월이 물같이 흐른 후에야
   고요한 사랑이 메아리 친다

2. 꽃피는 봄엔 강변에 나가 꽃잎을
   띄우리라 그대 집까지
   가을밤에는 기러기 편에
   소식을 전하리라
   사무친 사연 사무친 사연 아아아아아아아~
   진정 이토록 사무칠 줄은
   세월이 물같이 흐른 후에야
   고요한 사랑이 메아리 친다

                 (1963, 서인경 작사/ 박춘석 작곡)

 

▲ 후배들 후원으로 50년만에 새노래를 발표하고 기념촬영.(사진 앞줄 왼쪽 한명숙, 오른쪽 명국환)

‘별난 인연’으로 스타가수의 길 닦아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안다성은 충북 청주가 고향으로 중학교를 마칠 무렵 6.25를 맞았다. 그곳에서 야전공병단 군예대원으로 입대해 군 위문공연 활동을 하다가 제대했다. 그리고 당시 청주에 피란 와 있던 신흥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 전성기때의 안다성 히트앨범 재킷

3개월 뒤, 9.28수복과 함께 대학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이때 훗날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를 작곡한 손석우와의 인연으로 KBS 전속가수 3기로 입사하면서 본격적으로 가요계에 터를 닦기 시작한다.
‘손석우와의 인연’ 에피소드 -신흥대 영문과 졸업반일 때, 청년 안영길은 서울 종로2가 화신백화점 근처에 있던 여정카바레라는 곳에서 취흥에 겨워 성큼 무대 위로 뛰어올라가 마이크를 잡고 현인의 탱고곡인 <서울야곡>을 불러제낀다. 한순간 극장 안이 술렁이다가 조용~ 관객들이 그의 노래에 집중한다.

이를 본 손석우가 청년 안영길에게 명함을 건넨다.… “언제 한번 찾아오게나!”
당시 손석우는 KBS 전속 악단장이었다. 이때 손석우의 적극적인 권유로 KBS 전속가수 3기 공채에 출전해 전속가수가 된다. 사실상의 가요계 데뷔였던 셈이다.
<산장의 여인>을 부른 권혜경이 3기 동기가수다.

손석우와의 인연으로 불렀던 첫 히트곡이, 송민도와 듀엣으로 부른 우리나라 최초의 라디오드라마 주제가인 <청실홍실>이다.
그리고 <바닷가에서>, <사랑이 메아리 칠 때>의 연이은 히트로 스타덤에 오른 안다성은 <보헤미안 탱고>, <나의 탱고>, <이별의 탱고>, <뒷골목 탱고> 등 20여 곡의 탱고곡을 부르며 ‘탱고의 왕’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평생 그가 그의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은 노래는 대략 500여 곡쯤 된다.
그러는 사이에 <꿈에 본 내고향>을 불렀던 한정무가 부른 탱고곡 <에레나가 된 순희>를 리바이벌 해 불렀다.

그리고 ‘10년 넘게’ 자신이 출연하던 극장식 술집 밤무대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땀나도록 불러 히트고지에 올려놨다.
영화 <꿈은 사라지고> 주제가와 함께. <에레나가 된 순희>는, 노래 시작 전 신파극 대사와도 같은 두 연인의 대사가 가슴저미게 한다.

 

             <에레나가 된 순희>

  (대사)
칠석: 순희! 내가 왔어 얼마나 찾았다구,  순희!
순희: 흠흠흠, 순희라…순희가 아니에요. 어제의 못난 순희는 죽고, 이젠 에레나에요.…(중략)…어때요. 이 보석 귀걸이와 다이아 반지를 보세요. 그래도 순희라고 부르겠어요? 호호! 난 싫어요, 싫어! 그 가난하고 비참한 순희가, 그 순희가 싫어서 이렇게 에레나가 됐어요. 호호호.
칠석: 에이 더러운 년! 가난해도 못살아도  한 세상 변함없이 매미 우는 그 마을, 물방아 도는 그 고장에서 살자던 년이. 에이, 더러운 년! 다시는 고향생각 마라. 난 간다!

  (노래/1절가사)
 그날밤 극장 앞에서 그 역전 카바레에서
 보았다는 그 소문이 들리는 순희
 석유불 등잔 밑에 밤을 새면서
 실패 감든 순희가 다홍치마 순희가
 이름조차 에레나로 달라진 순희 순희
 오늘밤도 파티에서 춤을 추드라~

              (1954, 손로원 작사/ 한복남 작곡)

 

“노래 안될 때 조용히 쉬는 게 곧 은퇴”
그는, 그의 말대로 “당시 대통령 월급의 다섯배 되는 월급을 받는” 레코드사 전속가수로 있던 호시절에, 그의 공연을 구경하러 왔던 처녀(10년 연하의 강정남 씨)를 만나 결혼, 아들 둘에 손자를 두고 다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백수의 현역으로 살고 있는 그가 혹여나 현역에서의 은퇴를 생각해 본 적은 있을까.
“내 자신의 노래를 들어보고, ‘이건 도저히 아니다!’ 판단되는 날이 왔을 때, 조용히 쉬는 게 곧 나의 ‘은퇴’가 될 것이다. 이 세상에는 나보다 노래를 훨씬 잘하는 사람, 음악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하늘의 별 보다도 많다고 생각해서 항상 겸손한 자세로 노래를 불러왔다. 그러니 은퇴는 내게 사치스러운 얘기다.”

아마도 그의 생전에는 그의 은퇴를 볼 수 없을 것 같다.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확신에 찬 그에게서 ‘노익장의 미덕’을 본다.

저작권자 © 농촌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