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매네 반디농장 김영란의 전원일기⑳

"꿈은 삶에 방부제 역할
이제부터라도 싱싱하게
나답게 살아보길 꿈꾼다"

지지난해, ‘82년생 김지영’이란 영화가 호평을 받아서 나도 이웃 지인과 함께 보았었다. 나보다는 조금 더 젊은 이웃인 그녀는 영화 보는 내내 훌쩍거리며 눈물을 훔쳤다. 영화가 드라마틱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삶을 어느 정도 산 대한민국 여자들이 공감할 이야기였는데, 이웃 그녀가 감정이입해서 몰입한 것 같았다.

하지만 영화의 김지영보다도 더 역동적인 시대를 건너온 나는 예쁜 여배우의 얼굴을 보는데 더 탐닉했다. 싱싱하고 건강한 젊은이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부러워하는 나이가 됐는지. 주인공 배우가 겪어가는 내면의 변화보다도 ‘내가 저 나이 때는 어땠는지?’ 하는 생각만 맴돌았다. 나도 자신을 잊고 산 세월동안 때론 아프고 때때로 마음 방황이 스쳐갔지만 삶이 나를 혼비백산하게 내달리게 만들어서 나라는 존재를 잊고 살기 일쑤였다. 운명에 순응해 살아내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내게도 사춘기가 있었고, 내게도 20대가 있었고, 내게도 세 아이를 키우며 먼 미래를 꿈 꾼 적이 있었다. 대기업 샐러리맨의 아내가 돼서 부자는 못 돼도 순탄하게 안정된 노후를 평안하게 맞으며, 언젠가는 아이들과 세계의 문화유산들을 보러 떠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 기대했었다. 그런 꿈이 있어서 내핍하며 살 수 있었는데, 산 너머 더 큰 산을 올라야 하는 삶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40대 중반에 명퇴당한 남편 덕분에 나는 어쩔 수없이 독립여자로 거듭났다. 지금은 돌아보는 시점이라서 담담하게 표현하지만 호랑이 등에 올라 탄 것처럼 혼비백산해 살아내려고 온 힘을 다했었다. 왜 남자들이 단순무지(^^)한 면이 많은지를 내가 삶과 직면하고 나서 깨닫게 됐다. ‘단순하고 무식하자’는 삶의 모토를 정하게 되고서야 나는 무소의 뿔처럼 나아갈 수가 있었다. 온갖 미사여구식 표현은 결정장애만 불러오고, 단순명쾌한 결론으로 행동하는 것만이 나를 생산적인 존재로 이끌었다. 신경세포가 쓸데없이 복잡하던 나를 단순하게 만들어서 나는 오직 살아내는 일에만 몰입했다.

세 아이들을 자립할 때까지 돌보는 것이 나의 지상과제였으므로 농사지어서 번 돈으로 17년을 살아냈다. 온몸으로 일해서 번 돈의 의미를 체득했고, 나는 이제야 고요히 하늘의 이치를 아는 나이가 됐다.

지지난해, 오십대 마지막 해에 나는 머리에 대상포진이 왔다. 이미 몇 년 전부터 방전돼 몸이 삐걱거렸지만, 지친 모습으로 그냥 이어오던 삶을 급기야 멈춰 서서 재점검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발만 더 내달리면 내가 어찌 될지도 모르는 시점이 돼서야 나는 내 삶에 ‘멈춤’을 선언했다. 20대에 폐결핵을 앓고, 30대에 세 번의 개복수술을 하고, 40대에 또 개복수술을 한 내 몸은 내게 거세게 반항했다.

60대를 맞으며 나는 내게 선물을 주기로 했다. 나의 노고와 내면의 아픔과 잊힌 꿈을 누가 알아준단 말인가? 나는 사느라 잊어버린 꿈을 소환하고, 남은 삶은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보고자 선언했다. 아무도 내 삶을 대신해 줄 수는 없고, 이제 햇살이 비치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아서 용기를 냈다.
꿈은 삶에 방부제 역할을 한다. 이제부터라도 싱싱하게 나답게 살아보기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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