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의 트로트-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48> 명국환의 노래들 

▲ 그는 늘 노래와 함께하니 외롭지 않다고 했다.

금지곡 수난 속 방랑의 노래인생
가수는 두 개의 인생을 산다. 하나는, 겉에 드러나 있는 화려한 노래인생이고, 다른 하나는 그 노래라는 베일에 가려진 자기자신 본연의 타고난 인생이다.
노래인생이 곧 자기인생인 경우는 거의 없다. 재인광대같은 삶을 산다.

그래서 가수는 흡사 새 조련사에 의해 잘 조련된 앵무새와도 같다. 노랫말을 지은 작사가와 그것을 멜로디(소리)로 표현하는 작곡가의 생각으로 만들어진 노래를 작곡가의 조련을 거쳐 노래할 뿐이다. 쉽게 말하면, 노래 잘하는 앵무새가 팬들의 선택을 받고, 그 인기를 먹고 산다.

그 노래들이 쌓이고 쌓여 육화(자기화) 되면서 자기만의 색깔을 지니게 된다.
누구는 팝가수, 누구는 뽕짝가수…
다만, 그 생명력, 더 나아가 운명(심지어는 개인적인 삶)까지도 가요팬들의 입맛에 의해 결정된다. 불행이라면 불행일 수 있다.

1950년대 최고 인기가수의 한 사람이었던 명국환(明國煥, 1933~ )의 경우는 당시의 우리 대중가요판에서 상당히 특이한 분위기의 노래를 가지고 나와 주목됐다.
우선, 성씨도 옛 중국 서촉에 본관을 둔 귀화성씨인 명 씨다. 그는 가요판에서 드물게도 예명을 쓰지 않고 자신의 본명을 그대로 쓰고 있다. 명 씨들은 전남 고흥과 충남 청양을 세거지로 해서 우리나라에 2만7100여 명이 산다.

그런 그가 부른 노래들이 우리 본래의 노래정서와는 다른 서양풍경을 경쾌한 리듬에 실어 노래한, 소위 마카로니 웨스턴 스타일의 노래들이라는 점이 관심의 대상이 됐다. 전후 들어온 미국 서부영화와 팝음악의 영향이다.
그런데 그 묘사가 조금 우스꽝스럽고, 어색하기까지한 노래였다. ‘벤조를 울리며 마차를 타고 저 산골을 돌아가면 내 고향이다…말방울 울리며 마차는 간다…’
하니, 그가 가는 고향은 어디인가?

▲ 명국환 최대히트곡 <방랑시인 김삿갓> 노래비(강원도 영월 김삿갓묘소).

물론 작사·작곡자의 취향이지만, 아무튼 경쾌한 4분의 2박자 폴카춤 리듬에 실린 그의 노래에 젖어, 눈물 찔끔거리는 틀에 박힌 전통 트로트에 흠씬 젖어있던 우리의 대중가요팬들이 그의 노래에, 노래 속 마차에 올라탔다.

누구는 “수준 낮은 이국취미의 노래”라고 했다. <내 고향으로 마차는 간다>, <아리조나 카우보이>(김부해 작사/ 전오승 작곡)같은 노래는, 1950년대 전후 혼돈의 거리에서 우리 대중가요 팬들에게 이국취미를 맛보이며, 그가 끄는 마차를 타고 말방울 울리며 신나게 달리게 했다.
이러한 미국 취향의 마카로니 웨스턴 스타일의 노래에서 우리의 트로트 스타일로 그를 구원(?)한 건, 1955년에 내놓은 <방랑시인 김삿갓> 이었다.

 

▲ <방랑시인 감삿갓>앨범재킷

        <방랑시인 김삿갓>

1. 죽장에 삿갓쓰고 방랑 삼천리
   흰구름 뜬 고개 넘어 가는 객이 누구냐
   열두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술 한잔에 시 한수로 떠나가는 김삿갓

2. 세상이 싫든가요 벼슬도 버리고
   기다리는 사람없는 이 거리 저 마을로
   손을 젓는 집집마다 소문을 놓고
   푸대접에 껄껄대며 떠나가는 김삿갓

3. 방랑에 지치었나 사랑에 지치었나
   개나리 봇짐지고 가는 곳이 어데냐
   팔도강산 타향살이 몇몇  해던가
   석양지는 산마루에 잠을 자는 김삿갓

                  (1955, 김문응 작사/ 전오승 작곡)

▲ 마카로니 웨스턴 스타일의 노래 <아리조나 카우보이>앨범재킷

이 노래는 역사인물 김삿갓(조선조 때 김병연)을 소재로 한 이른바 ‘고사가요’의 대표적인 작품이자 성공한 노래로 꼽힌다. 역사드라마(사극)나 역사영화의 주제곡들이 모두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고사가요’의 뿌리는 1930년대 중반의 일본에 있다. 이 노래로 명국환은 데뷔 한 해만에 확실하게 톱스타의 자리에 올라섰다.

1957년에 실시한 가수 인기투표에서, 1위 현인(<신라의 달밤>, <굳세어라 금순아>), 2위 명국환, 그리고 3위가 명국환의 한참 선배인 남인수(<가거라 삼팔선>, <이별의 부산정거장>)였다. 이 노래는 나오자마자 뜨기 시작해 불과 몇해 만에 45만 장이라는 경이적인 음반 판매기록을 세웠다. 노래비는 훗날(2000년)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노루목천에 있는 김삿갓 묘소 옆에 돌비로 세워졌다.

그러나 반짝이는 영화도 잠시. 이 노래는 1935년 일본 가수 우츠미 기요시(宇都美淸)가 떠도는 야쿠샤의 외로움을 노래한 고사가요 <아사타로 쓰끼요(淺太郞 月夜)>(아사타로의 달밤)를 표절한 왜색가요로 밝혀져 1965년 발매금지곡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20여년 뒤인 1987년 금지가요 일체 해금 때에도 제외돼 빛을 보지 못하고, 음지에서 가요팬들 입에서 입으로만 떠돌아 다니는 처연한 방랑의 노래가 됐다.

▲ <명국환 히트곡>모음 앨범재킷

악극단 단원을 꿈꾸던 소년
명국환은 북녘땅 황해도 연백이 고향이다. 그는 이미 고향 연안중학교 2학년 때 연안극장 콩쿠르에서 남인수의 <남아일생>을 불러 3등에 입상할 정도로 장차 가수가 될 타고난 끼를 가지고, 악극단 단원을 꿈꾸던 소년이었다.

그러나 그 이듬해에 6.25전쟁이 일어나 혼자 강화도로 피난했다. 막상 먹고 살길이 막막했다. 그래서 ‘빵’을 위해 자원입대한 곳이 유격부대의 위문대였다. 계급없는 병사의 몸으로 최전방 위문공연 활동을 했고, 얼마 후엔 서울에 있는 미 극동사령부 위문공작대로 자리를 옮겨 휴전 때까지 군부대 위문공연 활동을 계속했다.

그리고 휴전 후, 위문부대 해체와 함께 상경해 재향군인회 주최 전국 콩쿠르에서 1등에 입상, 곧바로 소년시절 꿈꾸던 샛별악극단에 입단해 본격적인 가수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과거를 묻지 마세요>를 부른 가수 나애심을 알게 돼 그녀의 소개로 그녀의 친오빠인 작곡가 전오승과 인연을 맺고, 데뷔곡 <백마야 울지마라>를 세상에 내놓게 된다.

 

    <백마야 울지마라>(1절)

 백마는 가다 울고 날은 저문데
거치른 타관길에 주막은 멀다
옥수수 익어가는 가을 벌판에
또다시 고향생각 엉키는구나
백마야 백마야 울지를 마라

            (1954, 강영숙 작사/ 전오승 작곡)

 

남성가수 목소리로서는 낭랑하면서도 깔끔한 목소리에, 기교가 현란하지 않은 자연스럽고 소탈한 창법으로 당시에 틀에 박혀있던 전통 트로트 가수들과는 차별화됐다.
그리고 1955년 <방랑시인 김삿갓>, 1956년 <내 고향으로 마차는 간다>, 1959년의 <아리조나 카우보이>의 연이은 대히트로 인기의 정점을 찍는다.
그런 중에 <방랑시인 김삿갓>을 발표하던 해에 자신이 가장 아끼는 애창곡이 된 건전가요풍의 노래 <청춘의 삼색깃발>을 부르며 꿈과 희망을 노래한다.

오늘밤도 고향가는 꿈을 꾼다
그러나 이 노래 역시 ‘금지곡’이라는 철퇴를 맞는다. ‘장미꽃’의 빨간색은 북한 공산당 깃발의 색깔, ‘깃발’은 북의 상징, ‘청노새 달려가자’는 북한 공산당의 남침야욕을 비유한 것이라는 것이 금지이유였다.

<방랑시인 김삿갓>에 이은 <청춘의 삼색깃발>까지 천형처럼 금지곡으로 묶이면서 최고 인기가도를 달리던 명국환의 허리가 꺾였다.
그런 와중에서도 1965년 동양TV가 후원하고, 국제신보가 주최한 <1965 국제가요대상 10대가수>에 남일해, 박경원, 안다성, 최희준, 김용만, 박재란, 한명숙, 현미, 이미자와 함께 선정되기도 하면서 정상에 올라 있었지만, 연이은 히트곡의 금지곡 지정으로 날개가 꺾이듯 심리적·경제적 타격을 적잖이 입었다.

의욕도 꺾였다. 그런데다 결혼생활도 연이어 파탄에 이르러 생활의 안정을 잃어갔다. 그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모두 네 번의 결혼에 실패했어요. 내가 바람끼가 있는 것도 아닌데… 계속 실패한 것은 아마 팔자소관인 것 같아요…”

또 한동안 그의 ‘부천의 25만 원짜리 월세 단칸방살이’가 세상의 뉴스거리가 된 적도 있다. 그러나 그는 “그래도 늘 노래가 나와 함께 하니까 외롭지 않다”고 했다.
그건, 단지 그의 마음의 자위에서 나온 말일 뿐이다. 그의 건강은 전같지 않다. 엉거주춤한 걸음걸이가 그렇고, <가요무대>에 출연해 노래할 때의 목소리 또한 예전같지 않다. 호흡이며 목 상태가 전같지 않아 저음구사가 듣기 거북할 정도로 심하게 탁하고, 힘들어 보인다. 듣보는 이들이 오히려 가슴 짠한 연민을 느낄 정도다. 그건, 그의 한결같은 맘속의 바람과는 별개여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올해 만 88세인 그는, 오늘도 휑한 단칸방에 홀로 누워 “달 실은 청노새야 별 실은 청노새야 달려가자 내 고향으로…”
노래를 읊조리며 북녘땅 고향가는 꿈을 꾼다. 짤랑짤랑 아득히 멀어져 가는 말방울소리를 듣기라도 하듯 애써 귀를 곧추세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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