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자매네 반디농장 김영란의 전원일기 ⑲

"남편의 명퇴로 인해
여전사로 거듭나면서
나는 삶에 용기가 생겼다"

겨울 과일인 귤농사는 겨울이 가장 바쁘고, 쉴 새도 없이 돌아서자마자 봄 농사에 돌입하는지라 거의 연중 바쁜 셈이다. 대체로 설 명절까지 수확 배송을 하고나면 이미 봄꽃 매화가 벙근다. 지친 귤나무의 수세 회복과 영양 보충을 위해서 생선액비로 엽면시비 했다. 땅으로는 유용미생물을 보충해주고, 유기질 퇴비를 봄비료로 주느라 봄날도 전력질주는 아니지만 쉼 없이 분주했다. 가을 수확을 풍성히 하려면 농부가 봄에 부지런해야 한다.

봄 농사 중 대미(大尾)는 전정이다. 과수농사에서 가장 기술적이며 중요한 부분인데, 가지를 잘라서 수형을 잡거나 묵은 가지 제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목적은 수확을 조절하고, 나무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해 결실한 나뭇가지를 잘라주면 새 가지가 나와서 예비가지가 돼 이듬해 열매를 맺는 가지를 만드는 것이다. 묵은 가지를 자르면 새 가지가 나오면서 새 뿌리도 나오기에 나무가 나이를 먹어도 노령화가 되지 않게 해주기도 한다. 적절한 전정은 과수농사 중 가장 중요한 것이다.

전정과 파쇄까지 끝내고나면 한 숨 돌리게 되는데, 올 봄은 귤나무 새싹이 보름정도 빨라서 더 서둘러서 일을 해야만 했다. 해마다 전정을 하지만 크고 작은 가지를 잘라낸 것이 집채만큼 나와서 파쇄까지 다하고 나면 다리 힘이 풀린다. 농부의 봄날은 뻐꾸기(여름새) 소리가 들릴 때까지는 허리 펼 날이 없다.

귤 농사를 배우던 초기시절에 전정 강의를 들으러 갔는데, 강사님이 “육지 사람들이 와서 뭣도 모르고 유기농 한다고 하다가 야반도주하는 것을 많이 봤다” 하시며 나를 힐끗 바라보셨다. 은근히 기분이 나빴지만 도시물이 빠지지 않은 나를 보고, 더구나 아줌마가 전정을 배우러 왔나 싶어서 그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그대는 나를 모르고 한 소리여!” 하는 오기가 농사 내내 어려울 때마다 상기됐다.

서울에 살 때부터 재미삼아 쓰던 블로그에 유기농 귤농부가 됐다고 온 세상에 공표한 것도 나를 절대 야반도주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남들이 했다면 나도 할 수 있어~” 이런 마음으로 시작했건만 시시때때 아득해진 순간이 내게도 왜 없었으랴. 야반도주할 것 같은 도시의 아줌마가 대다수 남성수강생 사이에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전정교육을 받았으나 부정의 눈길은 가시지 않았다. “여자가 뭘 한다고 그래~” 하는 눈초리.

그런데 허리춤에 전정가위와 톱을 차고 배운 대로 요리조리 전정을 해보니 너무나 재미있었다. 내 맘대로 내 밭에서 요리 자르고 조리 자르고... 미용사가 가위 들고 이발하듯, 가위질을 멈출 수 없었다. 초보들은 잔가지 전정을 많이 하게 되는데 이제는 큰 틀에서 큰가지를 과감하게 자른다.

장마철에는 보름이면 한길씩 자라는 풀들도 제초를 하기 위해 예초기를 둘러매니 예초기를 둘러맨 나를 보고 제주도 아주망이 자기도 안 해본 일이라며 혀를 찼다. 예초기를 둘러메고, 전정을 하고, 남성의 영역인 분야를 도전하니 내 안에 잠자던 기운도 발휘되기 시작했다. 남편의 명퇴로 인해 여전사로 거듭나면서 나는 삶에 용기가 생겼다. 어려움에 직면한 인생 후배들에게 “용기 내어 도전해보라”고 힘내는 말을 전하고 싶다. “내가 했듯이 그대도 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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