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의 트로트-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45> 송춘희<수덕사의 여승>, <영산강 처녀>

▲ 충남 예산 수덕사 전경

“내 인생 깡그리 바꿔놓은 <수덕사의 여승>”
1965년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다소 특이한 타이틀의 노래가 처음 세상에 나오자, 대중가요 팬들은 송춘희(宋椿姬, 1937~  , 만 84세)라는 여가수에 주목했다. 낭랑하면서도 미려한 바이브레이션, 절묘하게 강·약을 조절하며 호흡을 넣고 빠지는 힘 있는 가창력은, 황금심·황정자와 같은 이전의 신민요 가수를 연상시켰다.

▲ 송춘희의 공연모습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단숨에 정상에 올라섰다. 그는 이 노래 하나만 가지고 하루에만 5개 극장에서 하루 4회씩 20회 노래를 부르고, 방송과 야간업소 여덟 군데를 돌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나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수덕사의 여승> 한 곡이 내 인생을 깡그리 바꿔놓았다!”

그 하나는 자신은 절과는 거리가 먼 집안- 고모할아버지가 답십리 장로교회를 건립할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이 노래가 뜨자 다들 그에게 묻더라는 것 “수덕사 가봤어요?” 하도 듣기 민망해 당장 먼 수덕사엔 못가고 서울 집에서 가까운 절엘 갔다 왔다는 것. 그런데 법당에서 절을 어떻게 하는지도 몰라 우두커니 서 있다 왔다고 했다.

두 번째는 수덕사 스님들의 항의였다.
노래 가사 중 ‘속세에 두고온 님~ 속세에 맺은 사랑 잊을 길 없어/법당에 촛불켜고 홀로 울 적에~’라는 가사 내용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 당시 베스트셀러가 된 <청춘을 불사르고>라는 회고록을 내고 머리깎고 입산한 김일엽 스님을 떠올리게 하고, 욕되게 한다는 게 구체적 이유였다.

이 항의는 수덕사 앞 주차장에 세운 노래비를 무너뜨리는 사태로까지 비화됐다.
노랫말을 지은 작사가 김문응의 생전 회고에 따르면, 당시 세간에 떠들썩하게 화제가 됐던 소설가 춘원 이광수와 수덕사 출가 전 김일엽 스님의 사랑을 이야기의 모델로 삼았다고 했다.
게다가 당시 노래할 때마다 흰고깔에 승무복을 입고 목탁을 치는 송춘희의 비주얼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색다른 흥미와 호기심을 유발시키기도 했다.
결국 송춘희는 이 노래 한 곡이 인연이 돼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법명은 백련화. 1969년에는 황금심이 이 노래를 취입하기도 했다.

 

▲ <수덕사의 여승> 앨범 재킷

        <수덕사의 여승>

1. 인적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켜고 홀로 울 적에
   아~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2. 산길 백리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염불하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맺은 사랑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켜고 홀로 울 적에
   아~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1965, 김문응 작사/ 한동훈 작곡)

 

“송춘희 음악기념관 짓는 게 마지막 꿈”
송춘희는 지금 ‘불자가수 송춘희 법사’가 대외적인 직함이다. 지난 2016년에는 나이 팔순과 가수 데뷔 60주년을 맞아 신곡을 포함한 대표곡 기념음반을 냈다. 축하공연도 가졌다.
고교 때 성악가를 꿈꾸던 그가 대중가요를 처음 접하기 시작한 건 1956년 악극단 생활을 하면서부터다. 가세가 기운 탓에 대학 진학이 어려워졌다.

그후 1963년 <삼다도 편지>라는 노래를 내놓으며 공식적으로 데뷔하기까지 긴 무명생활의 서러움을 감내해야 했다.
<수덕사의 여승>의 빅히트로 바빠진 그녀는, 1967년부터 5년 연속 10대가수에 선정됐다. 하루 출연료 수입은 3000원에서 1만 원(당시 공무원 한 달 급여가 1만 원, 당시 최고 인기가수 출연료 7000원)으로 뛰어올랐다. 폭발적인 인기 실감이었다.

그는 공식행사 외에도 전국의 군법당과 교도소에 위문공연을 다니며 찬불가를 전파하고, 부처님 가르침과 자비나눔을 실천하느라 분주하다. 그 세월 만도 40년이다.

그가 지난 60년간 발표한 노래는 모두 1000여 곡에 달한다. 그중에서 <수덕사의 여승>의 인기에 버금가는 사랑을 받았던 노래가 <영산강 처녀>(1968)다. 이 노래의 노래비는 <수덕사의 여승> 노래비보다 한 달 앞서서 2000년10월 광주광역시 동구 선교동 너릿재 공원에 세워졌다.
이 노래는 슬픈 노랫말의 처연한 이별 이미지와는 달리 전주부분이 룸바 리듬으로 편곡돼 흡사 영산강 강바람을 가슴에 안는듯한 상쾌함을 준다.

▲ <영산강 처녀> 앨범 재킷

            <영산강 처녀>

1. 영산강 굽이도는 푸른물결 다시 오건만
   똑딱선 서울 간 님 똑딱선 서울 간 님
   기다라는 영산강 처녀
   못잊을 세월 속에 안타까운 청춘만 가네
   길이 멀어 못오시나 오기 싫어 아니 오시나
   아~푸른물결 너는 알지 말을 해다오
2. 유달산 산마루에 보름달을 등불을 삼아
   오작교 다리놓고 오작교 다리놓고
   기다리는 영산강 처녀
   밤이슬 맞아가며 우리 낭군 얼굴 그리네
   서울 색시 고운 얼굴 정이 깊어 아니 오시나
   아~구곡 간장 쌓인 눈물 한이 서리네

                     (1968, 천지엽 작사/ 송운선 작곡)

 

그의 노래봉사 중에서 빼놓지 않는 것이 군부대를 방문하는 것. 전국의 어지간한 군부대는 다 다녔다고 했다. 특히 1960년대에 파월장병 위문공연을 네 차례 다녀왔다며, “늘 앙코르송으로는 그녀가 부른 신민요 <노랫가락 차차차>와 <신이별가>를 불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1976~1983년 미국 시애틀로 이민갔던 7년여의 시간 외에는 늘 노래봉사를 해왔다. 구십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평생을 미혼으로 살아왔다.
60~70대 팬들이 아직도 기억하는 그의 대표곡들은, <수덕사의 여승>, <영산강 처녀>, <할아버지 쌈짓돈>, <노랫가락 차차차>, <진정이라면>, <신이별가>, <남산골 샌님>, <눈물의 한탄강>, <영덕은 내고향> 등이 있다.

그가 그동안 자신의 음반판매 수익금을 모아 건립한 군법당 만도 5곳이 넘는다.
게다가 자신의 법명을 붙인 백련장학회를 설립해 장기수 복역자 자녀들을 위한 장학사업도 지난 30년간 묵묵히 해왔다.

그의 마지막 바람- “아프지 않고 계속 부처님 가르침 전하며 노래봉사 하는 것, 그리고 송춘희 음악기념관을 짓는 것이 마지막 원력!”이라고 했다.
‘나무관세음보살~’이다.

 

▲ 김일엽 스님

<청춘을 불사르고>는 1920년대 나혜석·김명순과 함께 신여성 작가로 불렸던 김일엽(金一葉, 1896~1971)이 1962년에 펴낸 회고록(산문집)이다.
김일엽의 본명은 김원주(金元周). 일엽이란 이름은 훗날 일본 유학 중에 만난 소설가 춘원 이광수가 일본 신여성 작가인 히구치 이치요(桶口一葉)의 이름에서 따와 지어준 필명이다.

목회자 집안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신앙심이 매우 깊어 여덟 살에 “전도부인이 되어 지옥에 가는 인간들을 구제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던 그녀였지만, 연이은 불행과 결혼의 실패- 즉 개인적 스캔들로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1913년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파 연희전문 교수로 있던 40대의 불구 독신남 이노익과의 결혼(23살), 그리고 “의족다리가 밤에 공포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3년 만에 이혼했다.
이후 그의 총 여덟 번에 걸친 결혼-이혼-미혼모 경험과 유부남·재가승과의 동거생활을 이어가며 자유연애론을 주장했다.

▲ <청춘을 불사르고> 초간본

“정조를 잃은 것을 마치 어떤 보옥으로 만든 그릇이 깨어져서 못 쓰게 되는 것 같이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정조란 그런 고정체가 아닌 것입니다. 정조는 어디까지나 사랑이 있는 동안에만 있는 것입니다.”
- 조선일보 게재 <나의 정조관> (1927.1.8일자)

김일엽의 주장은, 당시로써는 상당한 파격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여성해방을 부르짖었다.
“우리도 남같이 살려면, 남에게 지지 아니하려면, 남답게 살려면, 전부를 개조하려면, 여자 먼저 해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여자> 창간사 중에서

여성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여성잡지 <신여자>는 여성의 자각과 의식개혁, 해방을 온 세상에 부르짖은 잡지였다.
그리고 1933년 38세에 수덕사 만공스님의 문하에 들어가 “일엽이 연꽃처럼 되었고, 성품도 백련과 같으니 도를 이루는 비구니가 되었도다!”라는 법문을 하사받고 완전히 절필, 속세를 떠났다.

남성으로부터의 해방, 부모로부터의 해방, 기존 가부장적 윤리로부터의 해방을 끊임없이 부르짖은 신여성-김일엽의 <청춘을 불사르고>는, 세상에 출간돼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 책을 사 읽고 감동, 결단한 나머지 집에서 나와 예산 수덕사로 출가한 여인들도 전국적으로 상당수였다고 소문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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