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자매네 반디농장 김영란의 전원일기 ⑰

"내가 겪었던 울화통을
되갚아 주리라 했는데
안타깝게 부도수표 될 듯"

심히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의 취미는 남편 흉보기였다.(^^) 명퇴 후 24시간 함께 생활하는 동업자가 된 남편과, 소소히 쌓이는 갈등과 불만을 안으로 삭히지 못하고 지인들과 만나면 남편을 안주삼아 흉이라도 실컷 보아야만 살 것 같았다.
이해불가 벽창호 같은 단세포 원시동물이라는 둥, 사람 모습을 한 아메바 무뇌충이라는 등 말로서 분풀이 할 수 있는 온갖 표현으로 실컷 흉이라도 하고나면 그나마 마음에 쌓지 않고 견뎌낼 수 있었다.

대화의 접점을 찾아보려고 시도하면 들은 척도 안하고 마이동풍(馬耳東風)이고, 힘의 우위로 지배하려는 근성을 발휘했다. 남편의 정책은 가화만사성을 위해 양보한 나의 배려덕분에 퇴직 후 10여 년은 유지됐으나, 아이들이 모두 성장해 육지로 떠나자 나는 화산 폭발하듯 참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이해할 수 없던 사건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세 아이들이 밤늦게 야간자율학습으로 자정 무렵에야 집에 오는데, 남편은 아이들 생각은 아랑곳없이 코를 드르렁 골며 자고 있으니 나는 꾸벅꾸벅 졸면서도 아이들을 데리러 가야했다.
사오정세대 삼식씨는 왕의 밥상을 주문했다. 갓 지은 밥에 신선한 반찬을 주문하며, 재탕 삼탕하는 찌개류와 장아찌는 절대 먹지 않고, 신선한 밥상을 매 끼니마다 요구했다. 23년간 호텔 요리사에게 합격점을 받아야하는 밥상을 감당해야하는 신세라니...

내가 꽃을 너무나 좋아해 삽목해 키운 어린 꽃나무를 예초기로 날려버리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내편이 아니라 남의편만 드는 이해불가의 동포와 ‘앞으로 남은 삶을 함께 살아야 하나’ 하며 구체적인 고민을 한 적도 많다.
허우대 좋고, 목소리 커서 남자다워 보이고, 사람 좋아 보이는 남편을 보면 남들은 기가 센 마누라인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지만 실은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다. 남편 덕분에 나는 도를 닦아서 성인 반열에 오를 지경이었으나 내 그릇도 종지만해 애만 끓이지 득도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런데 작년부터 남의 편이 변하고 있다. 남편은 점점 여성 호르몬이 증가하는지 하루 종일 TV 리모컨을 들고 앉아서 여자처럼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미스트롯, 미스터트롯을 몇 번이고 재탕해서 보며 재미있어하는 남편이다.

지난해는 예초를 하다말고 와서 예초기에 잘려나가는 풀들이 불쌍하다고 하기에 내 귀를 의심했다. 꽃을 좋아하는 아내 덕분에 함께 꽃을 좋아할 것 같지만 한 번도 꽃을 쳐다보지도 않더니, 지난해부터 자잘한 앙증맞은 꽃을 보며 이쁘다고 해 내 귀를 흔들어 보았다. 잘못 들었나?

올해는 남편이 더 이쁜 짓을 자발적으로 한다. 내가 도로가까지 심어놓은 꽃들이 삭정이가 돼서 치울 일에 머리 무거웠는데, 공치사도 안하고 깨끗이 치워주는 기적이 생겼다. 눈이 의심스럽고. 현실인가 꿈인가 싶었다. 언젠가는 내가 겪었던 울화통을 되갚아 주리라 했는데 안타깝게도 부도수표가 될 것 같다.

나는 점점 남성호르몬이 증가하며 결전의 날을 벼르고 있었는데, 호랑이가 토끼로 변해 가다니... 참고 살다보니 살만한 세상이 도래하는구나~
남편이 변해가니 나도 변해간다. 이제 일식씨를 삼식씨로 승격해도 기꺼이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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