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의 트로트-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44>한명숙의 노래들

▲ 후배들이 열어준 <한명숙 헌정음악회>에서 열창하는 한명숙(2010)

‘난 바람이어라 / 작은 바람이어라 /숨어 소리만 내는 바람이어라 // 난 바람이어라 / 외로운 바람이어라 / 스쳐지나가는 바람이어라/인생도 사랑도 / 바람따라 세월따라 /소리없이 흘러가는 것 / 오늘도 가련한 내 영혼은 / 바람따라 너울거리며 춤을 춘다’

지난 2010년, 가수 데뷔 50년 만에 새 노래 <난 바람이어라>를 부르던 백발의 한명숙은 울컥 목이 메어 노래를 이어가지 못했다. 아, 이게 얼마만인가… 일흔 다섯 살의 나이에 새 노래라니. 정말 ‘스쳐 지나가는 외로운 바람’같이 살아 온 인생이었던 걸까.
후배가수들(한국싱어송라이터협회)이 열어준 <한명숙 헌정음악회>(2010년 10월20일 여의도 KBS홀) 자리에서 왕년의 대스타 한명숙은 상기된 얼굴로 회한에 젖어 눈시울을 적셨다.

▲ 최전성기때의 한명숙 모습

1960년대를 새롭게 연 노래로 평가
한명숙(韓明淑, 1935~  )이 부른 최고의 히트곡이자 대표곡인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1961)는 우리의 대중가요 역사에서 과거 일제시대부터 주류로 자리잡아 온 전통트로트, 그리고 같은 시대의 이미자·조미미의 트로트와는 달리 확실하게 1960년대를 새롭게 연 노래로 평가받는다.
노랫말은 직설적인 화법의 산문형식이고, 리듬과 선율은 미국 서부 컨트리 송을 모방한 경쾌한 스윙리듬의 32마디 곡. 그 전편을 바람이 몰아치듯 바이올린 선율이 휘몰아 간다.

게다가 여태까지의 전통 트로트의 맛을 내던 ‘꾀꼬리같은 목소리’와 완전 결별해 재즈나 블루스, 트위스트 느낌을 주는 한명숙의 허스키(husky)한 굵직하면서도 호소력 있는 목소리는 그 이전의 서양풍 노래와도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여기에서 그 당시의 에피소드 하나.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를 작사·작곡한 손석우(孫夕友, 1920~2019)는 자신이 직접 뷔너스 레코드(Vinus Record)회사를 설립하고, 최희준(한명숙을 손석우에게 소개한 장본인)·한명숙·블루벨즈(남성4중창단)의 노래를 취입, <손석우 멜로듸>라는 공동데뷔앨범을 내놓았다.

그런데, 음반을 시중에 내놓자마자 전국 레코드가게에 풀어놓은 음반들이 무더기로 반품돼 되돌아 왔다.- “한명숙이란 여가수가 진짜 가수가 맞느냐, 목소리가 쉰 것처럼 이상하다.” 이것이 반품 이유였다. 그 당시 여가수 노래의 제1조건은, 이름하여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 ‘꾀꼬리같은 목소리’라야 했던 것.

게다가 한명숙의 어눌한 영어발음에 대한 혹평도 쏟아졌다. 이러한 반품사태는 거의 반년간 이어졌다. 갓 데뷔한 한명숙으로서는 호된 데뷔신고식을 치른 셈이었다.
그러한 고비를 넘기자 상황이 서서히 반전되면서 조금씩 히트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때를 놓칠세라 손석우는 나라 안 춤곡의 유행(맘보ᆞ트위스트)에 주목했다. 그리하여 재빠르게 처음에 느린 블루스풍의 재즈스타일로 만들었던 원곡의 노래를, 빠른 스윙템포의 트위스트곡으로 편곡해 한명숙에게 다시 부르게 했다.
예감은 적중했다. 나라 안을 온통 노란 색깔로 물들여가며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노래가 흘러넘쳤다.

▲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 앨범재킷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

노오란 샤쓰 입은 말없는 그 사람이
어쩐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에 들어
미남은 아니지만 씩씩한 생김생김
그이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에 쏠려
아아 야릇한 마음 처음 느껴본 심정
아아 그이도 나를 좋아하고 계실까
노오란 샤쓰 입은 말없는 그 사람이
어쩐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에 들어

아아 야릇한 마음 처음 느껴본 심정
아아 그이도 나를 좋아하고 계실까
노오란 샤쓰 입은 말없는 그 사람이
어쩐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에 들어
어쩐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에 들어

            (1961, 손석우 작사·작곡 / 한명숙 노래)

 

▲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노랫말이 새겨진 작곡가 손석우 노래비(전남 장흥 우드랜드).

세계에 한류바람 일으킨 원조가수
노래의 대히트에 힘입어 그 이듬해인 1962년 3월에는 영화 <노란샤쓰 입은 사나이>가 만들어졌다. 신영균·엄앵란을 주연으로 엄심호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이 영화는, 서울 국도극장에서 개봉돼 인산인해를 이루며 15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기에 이르렀다. 이 영화에서 한명숙은 단역으로 출연했다.
특히 1963년 세계적인 샹송가수인 프랑스의 이베트 지로(Yvette Giraud)가 프랑스어 음반을 낸 다음, 서울 시민회관에서 내한공연을 가지면서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를 한국어로 노래해 세계적인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후 한명숙의 위상은 이 노래 한 곡으로 나날이 높아져만 가면서 동남아에서 러브콜이 쇄도했다. 1965년 아시아 톱가수 대우로 이뤄진 동남아 순회공연과 태국에서의 음반 취입, 대만에서의 중국어 번안 음반 출반, 1966년의 파월장병 위문공연에 이어 미국공연을 이어갔다.

▲ 프랑스 샹송가수 이베트 지로의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 한국어 앨범재킷

특히 미국인들은 동양인들을 만나면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를 아느냐”며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노란 샤쓰’의 열풍은 일본으로도 확산돼, NHK방송 초청으로 일본공연을 가졌고, 일본가수 하마무라 미츠코가 일본어 취입음반을 내기도 했다.

모름지기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는 1960년대 거센 한류열풍을 불러일으켰고, 그 중심에 한명숙이 있었다. 그래서 가요계에서는 한명숙을 ‘한류의 원조’ 혹은 ‘제1호 한류가수’라고 얘기한다.

병고에 생활고 겹쳐 가수활동 접어
원로가수 한명숙은 올해 만 86세다. 현재 국내에 생존해 있는 여자가수 중에서는 나이가 가장 많은 원로가수다.
평안남도 진남포가 고향으로 6.25전쟁 때인 1951년 16세 때에 어머니와 함께 월남, 인천에 정착해 성장했다. 지금도 그의 발음에서는 평안도 사투리 억양이 배어나온다.

평양음대 교수인 외삼촌의 제자(드러머 임원근)의 소개로 태양악극단에 입단, 연예계에 처음 발들여 놓았다. 이후 6.25전쟁중에 군예대에 참여해 ‘군번없는 병사’로 활약하기도 했다.
휴전 후인 1953년 미8군 쇼단인 럭키쇼단에 입단해 <세븐스타쇼>, <에이원쇼>에 출연하면서 노래를 시작했다. <체인징 파트너>, <아이 웬트 투 유어 웨딩> 등의 노래로 유명한 미국의 팝가수 패티 페이지 내한공연 때에는 함께 무대에 서기도 했다.

가수 한명숙을 말할 때, 아는 이들이 첫손에 꼽는 것이 ‘현모양처’란 말이다.
전쟁 후인 1956년, 군예대 활동시절 알게 된 군악대 소속 트럼펫 연주자였던 6살 연상의 이인성씨와 연애결혼해 2남1녀의 아이들을 둔 가정주부로서 가수로 데뷔했다. 그러나 남편이 군 제대 후 안정적인 직업을 갖지 못해 그녀의 노래수입만으로 가정을 꾸려나가야만 했다.

그러던 와중에 남편이 1970년 41세로 세상을 뜨면서 시부모와 시댁식구들, 그리고 친정어머니와 자신의 아이들까지 10여 명의 대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짐을 혼자 떠안게 됐다.
그런 그녀에게 연거푸 된시련이 덮쳐왔다.

심장병 치료를 위한 성대결절 수술로 3년여 동안 목소리를 잃고 지내야만 했다. 가수로서는 치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그후 회복과 함께 1980년대까지 꾸준하게 스캔들 하나 없이 성실하게 가수활동을 해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녀는, 어디서건 불러만 주면 “단 한 사람의 관객 앞에서라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노래한다”고 했다. 심지어는 자신이 단칸 월세방에서 어렵게 사는 형편임을 안 어느 팬이 찜질방으로 불러 반주 테이프 틀어놓고 목욕가운 입은 손님 대여섯명 앞에서 노래한 적도 있다며 털털 웃었다.

그녀는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가 전국을 휩쓸 때, 그야말로 한번 공연이 끝나고 나면 부대자루에 갈퀴로 돈을 긁어모을 정도로 많이 벌었는데(당시 연예인 중 국세청 납세자 1위에 올라,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연예인이기도 했다), “내겐 돈복이 없는지 한 푼도 내 손에 남는 게 없었다. 희한하게도 버는 족족 버는 만큼 새어나가는 구멍이 꼭 생기더라”며 씁쓸해 했다.

그런데다 그녀의 아들(이명훈의 <내 사랑 영아>를 작곡한 이인권)이 공황장애를 앓아, 그 충격으로 말을 잃는 실어증이 찾아오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녀는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로 정상에 올라 인기가도를 한참을 달리다가 시름시름 병고(퇴행성 관절염 등)와 생활고로 현역활동을 접었다. 첫 데뷔 이후 그때까지 세상에 내놓은 노래들은 대략 300여 곡쯤 된다.

<눈이 내리는데>, <우리 마을>, <사랑의 송가>, <검은 스타킹>, <센티멘탈 기타>, <그리운 얼굴>, <울고웃는 인생>, <강가에 피는 꽃>, <내 별은 어느 하늘에>, <세월> 등이 지금도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곡들이다. 번안곡으로는 앞서 예로 든 패티 페이지의 노래들을 많이 불렀다.

그녀는 다소 어눌한 말투로 얘기하며 환하게 웃는다.
“노래만 부르면 행복해요.”
그건, 구십을 눈앞에 둔 그녀의 변함없는, 죽을 때까지의 애절한 ‘희망사항’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어쩌면 영원히 이뤄지지 못할 그런 희망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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