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자매네 반디농장 김영란의 전원일기 ⑯

"이제는 일하는 게
즐거워진 농부가 된 것이
축복이라는 걸 깨닫는다.
신은 시련의 끝에
은총의 뒷문을
살짝 열어 두신다..."

돌아보니, 일이 내 몸에 맞는 옷처럼 됐을 때가 농부 10여 년차 됐을 때였던 것 같다. 4~5년차쯤에는 ‘노동력에 비해 수입도 적은 유기농부를 지속해야 하나...’ 하는 갈등 때문에 잠깐 기로에 섰던 것 같다.
귤나무도 유기농귤나무로 환골탈퇴하면서 초췌하기가 말할 수 없고, 수확량도 급감하니 이래서 유기농부를 포기하는구나 싶었다. 줄어드는 수확량을 메우려니 경작지를 늘려야 하고, 노동 강도는 점점 더 세지니 몸은 더 힘들어 지고... 정말 수지타산 맞지 않는 농사 같았다.
정책의 방향도 늘 수입지향적이라 연봉 1억 수입을 위한 강좌만 즐비하고, 정책 담당자나 최고위 지도급들이 대놓고 유기농 하지 말라고 공식석상에서 공공연히 말하곤 했다.(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구색 맞추기식으로 친환경농정과가 있기는 해도 그들 또한 유기농부는 아니었다. 친환경 농부들을 관리하고 재배방식을 심사하는 기관들도 유기농부가 아니었는데, 그들이 정한 기준이란 생산자 농부가 보기에는 탁상행정에서 나오는 주먹구구식 이론이 많았다.
유기농의 개념조차도 잘 모르고 재배해 본적도 없는 사람들이 하는 행정은 실제 유기농농부가 현장에서 겪는 애로사항을 전혀 고려하 않았다. 소비자는 더더욱 재배 현실을 모르고, 가격대비해 시중의 관행 농산물에만 열광하니 그나마 소신 갖고 농사짓던 유기농농부들마저 10년을 하고도 포기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나는 허허벌판에 선 한 그루 나무 같은 외로움을 종종 느꼈다.
그런 길에서 나는 무엇 때문에 버틸 수 있었을까? 무슨 사명감이 열렬해 16년 세월을 유기농부로 살아낼 수 있었을까? 아이를 셋이나 둔 부모이며, 남편이 ‘사오정’(45세 퇴직) 세대였는데, 누구보다도 경제적인 문제가 시급한 사람이 남들이 기피하는 유기농 귤농부가 돼서 버틸 수 있었을까?
헝그리정신, 배수진, 자존감, 사명감,.. 그런 단어들이 떠오른다. 우직함과 고지식함도 한 몫 했다.
다행이 하늘이 내 편이었는지 인터넷 상거래가 활성화되기 시작하면서 소비자와 직거래를 하게 됐다. 그 수많은 부정 요인들을 극복하고, 여기까지 당당히 올 수 있었던 것은 인터넷으로 소비자와의 직거래를 통해 내가 원하는 기본소득을 성취했고, 소비자와의 진정한 소통은 튼튼한 믿음거래를 구축하게 했다.
1년 전에 회비를 받고 기다리시게 하는 자긍심 강한 농부(^^). 믿음거래를 구축하려고 나는 작은 손해에 연연치 않고, 그 어떤 경우에도 회원을 우선으로 경영을 했다. 돈을 최우선 가치로 뒀다면 결코 올 수 없었던 길. 하지만 생명의 먹거리를 생산한다는 자부심은 그 모든 것과 상쇄할 수 있었다.
이제는 나도 작은 등대가 됐는지, 친환경 농부가 더 많아지고 소비자 인식도 더 확대됐다. 유기농하면 망한다고 하던 분들께 “당신, 유기농사 해봤어?” 하고 되묻는다. 유기농 개념도 잘 모르는 분들이 더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일하는 게 즐거워진 농부가 된 것이 축복이라는 걸 깨달으며, 신은 시련의 끝에 은총의 뒷문을 살짝 열어 두신다는 걸 알게 됐다. 오늘도 일하는 즐거움을 만끽해야지~

저작권자 © 농촌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