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수필-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무채색의 죽은 듯
메마른 풍경을
봄으로 물들이는 바람에
내 몸도 함께 물든다"

아무리 이불깃을 끌어당겨 눌러 덮어도 잠은 단단해지지가 않는다. 푸석하게 들떠있는 잠은 반투명의 눈꺼풀 안쪽으로 희끗희끗한 형상들이 날아다니고, 잠은 그 물가에서 더 깊이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하고 얕게 떠 있다. 결국 나를 깨운 건 입 안 가득 고여 있는 뻐근한 침묵의 불편함인가, 아님 멀리서 고막을 두드리는 소리인가~ 
귓바퀴는 점점 더 커져 소리 없이 넓어지고, 창밖의 어둠속 나뭇잎과 마당 섬돌까지 얇아진 귓바퀴 위로 작은 빗방울들이 떨어져 내린다. 토닥토닥 땅속으로 스며든다. 멀리서 찾아온 손님의 발자국 소리처럼 귓가를 아득하게 울린다.

나는 약간 부은 듯한 두 볼을 감싸 쥐고 혀끝으로 입 속을 점검한다. 윗니 왼쪽 끝에 사랑니에 염증이 있어 부어 위로 솟구쳐 있고, 윗니 오른쪽 끝에도 큰 어금니 3개중에 가운데 하나가 부러지는 바람에 결국 그 뒤에 있는 것도 홀로 지탱이 안 돼 잇몸이 부어 있어 시리고 아프다.
20대 졸업과 동시에 부산으로 발령받아 갔던 첫 부임지에서 아이들 교실에 큰 물주전자를 들고 올라가다가 슬리퍼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턱을 계단 모서리에 찧어 앞니 5개가 부서져 위 아래로 양쪽 이빨에 걸어 브리지로 해 넣고 써 왔는데 이제 그것조차 흔들거린다. 입 안을 돌아다니던 혀는 끌끌거리며 혀 찬 소리를 한다. 대공사를 해야겠다고.

이빨이 아픈 건 지 몸살이 난 건 지 느닷없이 8살 때 집 앞에서 놀다 자전거에 부딪쳐 광대뼈를 다쳤던 기억이 나고, 젊은 날 치기어린 시절에 친밀했던 친구가 말없이 떠나버린 상처가 떠오르기도 하고, 몸이 아픈 지 맘이 아픈 지 번지수를 알 수 없는 막연한 고통과 두려움이 나를 맴돈다.
몇 달 전부터 남편은 병원에 빨리 가보라고 윽박질렀다. “임플란트 비용이 아무리 많이 들어도 내가 다 줄 테니 가봐~” 치과는 자기도 가기를 꺼리면서 남의 일이라 그런가 선심을 팍팍 쓰며 달랜다.

주기적으로 다니는 병원에서도 당뇨가 시작됐으니 탄수화물(밥)은 적게 먹고 생채식과 단백질을 주로 먹으라고 지중해식 식사를 권유했다. 그러나 이빨이 시원찮은데 더구나 어금니가 아프니 생야채는 물론이고 잡곡밥도 씹기가 어려웠다. 몸에 누적된 모든 병의 치료에 첫 걸음으로 이젠 더 물러서 병원을 미룰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시골 동네는 벌써 거름을 뿌리고 땅을 갈아엎어 한 해 농사를 시작하는 일로 마을마다 분주하다. 우리도 겨우내 쳐 낸 배나무가지를 파쇄기로 부숴 갈아내고, 빈 땅에 거름을 뿌리고 땅을 엎고 올해 심을 씨앗들을 준비한다.

얼추 바쁜 일을 끝내고 드디어 오늘 날을 받았다. 다리를 건너고 마을을 벗어나 점차 좁은 산길을 따라 오르면 숨이 찰만큼 가파른 도로가 솟아오르고 양편으론 깊은 삼림이 우거져 있다. 달리는 차 안에서 보이는 것은 아직은 어둡고 황량하게 누렇게 뜬 잡목과 빽빽한 나무숲뿐이다. 그런데 멀리 하늘로 뻗은 실핏줄같이 가늘게 퍼진 나뭇가지 사이로 노오란 물결이 아른거린다.

아! 무채색의 죽은 듯 메마른 풍경을 봄으로 물들이는 바람에 내 온 몸도 함께 물드는 것 같다. 등을 보이고 돌아앉았던 풍경이 슬며시 얼굴을 돌리며 돌아앉아 여린 미소로 화해의 악수를 청하고 있구나. 궁지에 몰려 찾아가는 병원 길에서 나는 노오란 봄의 종소리를 오랫동안 맘에 품어 안고 굽이진 산길을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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