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의 트로트-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40> <이별의 인천항>, <잘있거라 부산항> 

▲ 부산항 영도다리

‘언제나 찾아오는 부두의 이별이 / 아쉬워 두 손을 꼭 잡았나 / 눈 앞에 바다를 핑계로 헤어지나 /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심수봉의 대표히트곡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1988)1절 가사의 일부다.
언제나처럼 마도로스 남자는 배처럼 항구에서, 그 항구의 여자에게 잠시 머물다 떠나가고, 여자는 언제까지고 항구의 부두에 서서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어낸다.
이 말 못할 신파성을 그 누구에게 하소연하랴… 

항구마다 등대마다 글라스에 맺은 인연- 님을 두고, 이별의 뱃고동 목메어 우는 항구를 남자는, 마도로스는 창공의 깃발처럼 옷깃을 날리며 표표히 떠나간다.… 그래도, 뻔뻔스럽게도 이 못 믿을 바람같은 한량을 ‘기다리는 순정만은 버리지 말아’ 달란다.
바로 박경원의 <이별의 인천항>, 백야성의 <잘있거라 부산항>이 그 적의 서정이 담뿍 담긴 대표 히트곡들이다.

 

▲ 박경원 히트곡 앨범재킷

(1) 박경원 <이별의 인천항>

1. 쌍고동이 울어대는 이별의 인천항구
   갈매기도 슬피우는 이별의 인천항구
   항구마다 울고 가는 마도로스 사랑인가
   정들자 이별의 고동소리 목메어 운다

2. 등대마다 님을 두고 내일은 어느 항구
   쓴웃음 진 남아에도 순정은 있다
   항구마다 웃고 가는 마도로스 사랑인가
   작약도의 등대불만 가물거린다

3. 마도로스  수첩에는 이별도 많은데
   오늘밤 글라스에 맺은 인연을
   항구마다 끊고가는 마도로스 사랑인가
   물새들도 눈물 짓는 이별의 인천항구

                 (1953, 세고천(전오승)작사/ 전오승 작곡)

 

박경원(朴慶遠, 1931~2007)은 인천 토박이다. 인천시 중구 신포동이 태어난 곳이다. 이곳에서 제법 규모 있는 미곡상집(쌀집) 7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나 무슨 일이건 호방한 아버지의 지원을 받았다.
중학교 2학년 어린 나이 때부터 각종 콩쿠르를 쓸고 다닌 것이나, 중학교 때부터 연애해 결혼에 골인하게 된 것도 모두 아버지의 용인 내지는 묵시적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박경원의 <이별의 인천항> 노래비(인천 월미도 소재)

상업고교를 거쳐 동국대 경제학과를 졸업(1955년)했다. 가요계에는 대학 2학년 때, 백난아가 부른 <찔레꽃> 작곡가인 김교성이 경영하던 계림극장 주최 전국 남녀 가요콩쿠르에서 당시 유행하던 현인의 노래를 불러 1등 입상을 하면서부터 발을 들여놓았다.
그런 그를 작곡가 전오승(<나 하나의 사랑>을 부른 가수 나애심의 친오빠)이 오아시스레코드사 전속가수로 픽업했다.

그리고 공식 데뷔곡이 된 <비애부루스>를 세상에 내놓았다. 1952년의 일이다.
현인의 창법과 비슷했던 그의 창법은, 발성과 음정이 정확한 정통파의 그것으로 꼽혔다. 그런 바탕 위에서 1953년 <이별의 인천항>으로 인기 정점을 찍는다. 당시 우리 노래판에서는 백설희의 <샌프란시스코>, 이인권의 <무영탑 사랑>이 크게 인기몰이를 하며 유행하고 있었다.

▲ 박경원의<만리포 사랑> 노래비(충남 태안군 만리포 해수욕장 소재)

이 무렵의 에피소드를 본인의 생전 회고를 통해 들어보자.
“전오승씨 밑에서 명국환이 하고 같이 데뷔했어요. 명국환 군의 <백마야 울지마라> 레코드판 뒷판이 내 노래 <비애 부루스>였거든요. 그리고 나서 여름에 전오승 선생님을 인천 작약도에 한번 모셨어요. 거기서 한 이틀 지내시다가 <이별의 인천항>을 작곡하시고는, ‘이거는 아마 경원이가 불러야 할거다.’ 하셔서 제가 불렀는데, 운이 좋았다고나 할까요, 인천 출신이 불러 히트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다행히 히트했습니다.… 그때는 레코드 가게 문 앞에다 가사를 다 적어서 붙이고, 확성기를 막 틉니다. 그러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 악기점 앞에서 그 가사를 보면서 그 레코드 노래에 맞춰 같이 합창을 하고 그랬어요.”

도미·최희준과 함께 해병대 연예대에서 복무하기도 했던 박경원은 그후 <인생은 XYZ>, <만리포 사랑>, <남성 넘버원(No.1)>, <나포리 연가> 등의 히트곡들을 비롯, 평생 그닥 많지않은 150여 곡의 노래를 불러 남겼다.

그리고 2007년, 장수라고는 할 수 없는 76세의 나이에 당뇨병 등의 지병 악화로 ‘인천항과 영영 이별’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고향 인천 월미도에 <이별의 인천항> 노래비(1999년 건립)가, 충남 태안군 만리포해수욕장엔 <만리포 사랑>(1958, 반야월 작사/ 김교성 작곡) 노래비(1994년 건립)가 세워져 있어 갈매기와 벗하고 있다.

 

▲ 백야성 최고의 히트곡<잘있거라 부산항> 앨범재킷

(2) 백야성 <잘있거라 부산항>

1. 아아아아~잘있거라 부산 항구야  
   미스 김도 잘 있어요 미스 리도 안녕히
   온다는 기약이야 잊으랴마는
   기다리는 순정만은 버리지 마라
   버리지 마라
   아아아아~또다시 찾아오마 부산 항구야

2. 아아아아~잘있거라 부산 항구야
   미스 김도 못잊겠어 미스 리도 못잊어
   만날땐 반가웁고 그리워 해도
   날이 새면 헤어지는 사랑이지만
   사랑이지만
   아아아아~또다시 찾아오마 부산 항구야

(1961, 손로원 작사 / 김용만 작곡)

 

▲ ‘마도로스 백’이란 별명으로 불렸던 백야성

본명은 문석준. 서울에서도 한복판 종로 태생인 백야성(白夜城, 1934~2016)은, 1957년 KBS노래자랑과 1958년 공군 복무 중에 오아시스레코드사 전속가수 모집 오디션을 통해 가수의 길에 들어섰다.
그후 1960년, 피난 시절부터 부산시 서구 아미동에서 도미도 레코드사를 운영해오던 가수이자 작곡가 한복남을 만나 <마도로스 부기>란 노래를 받아 취입하면서 공식 데뷔했다.
그 이듬해에 내놓은 <잘있거라 부산항>이 그의 생애 최고의 히트곡이다.

당시 부산은 전쟁 피난지의 상흔이 말끔히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이제 막 아침잠에서 깨어나듯 조금씩 기지개를 켜면서 활기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도로스의 이별과 항구의 서정을 얘기한 노래지만, 우울하지 않고 경쾌한 리듬에 신파적인 백야성 특유의 창법(호흡과 발음의 강약 조절)이 어우러져 어렵지 않게 대중의 취향을 저격했다. 대히트였다. 한량같은 마도로스의 엽색행각이 깔려 있는 노랫말이지만, 백야성의 타령조 창법에 다 묻혀 신나게 흘러갔다.

▲ 백야성·김용만이 듀엣으로 부른 일명 ‘공처가 송’ <김군 백군>

백야성의 노래에는 ‘마도로스’가 들어간 노래가 30곡이 넘는다. 그래서 ‘마도로스 가수’라는 별명도 붙었다.
<마도로스 부기>로 데뷔한 이후, <아메리칸 마도로스>, <항구의 영번지>가 <잘있거라 부산항>만큼 뜨고, <부두의 밤>, 현철이 리메이크해 크게 히트시킨 <못난 내청춘>, <녹슬은 청춘>, <모두가 꿈이었네>, <울고싶은 인생선>, <동경에서 온 편지>, <마도로스 삼총사> 등의 히트곡과 선배가수 김용만과 듀엣으로 부른 일명 ‘공처가송’<김군 백군>과 <왈순아지매>도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노래 상당수가 일본풍, 즉 ‘왜색조가 짙다’ 해 툭하면 방송금지곡으로 묶이는 불운이 이어졌다. 그의 최고 히트곡이라는 <잘있거라 부산항>도 세상에 나온 지 4년여 만인 1965년 방송금지처분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정상적인 가수활동을 이어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그는 훌훌 털고 일어나 1966년 <비 내리는 남포동>을 마지막으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가요계를 떠난다.
20여년 간 무대를 떠나 있다는 것 자체가 가수로서는 ‘사형선고’나 다름 없었다.
만년에 이르러 이따금 KBS <가요무대>에 얼굴을 내비치긴 했어도, 거기엔 지난 날 ‘마도로스 백’의 활기 넘치는 모습은 없었다.

‘부산항 마도로스 백’은 그렇게 ‘억울한 옥살이’를 한 것처럼 기를 펴지 못하고 떠도는 바람처럼 살다가 신부전증으로 82세에 이 세상 모든 인연을 끊고 저 세상으로 훌훌 떠나갔다.
항구는, 지금도 잠들지 못하고 외로이 떠나간 그의 넋을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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