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자매네 반디농장 김영란의 전원일기 ⑪

"명퇴해 집에 돌아온
남편 ‘삼식씨’는
모든 낙을 먹는데 집중..."

귀농 후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첫 번째로 남편과의 동업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남편을 도와서 보조하는 일이 아니고 남편이 명퇴할 것을 대비해서 내가 먼저 벌인 판이 귀농이었다. 그래서 귀농의 주체는 나였고, 모든 일의 해결사는 내가 돼야 했다.
신혼 초 10원짜리 인형 눈깔 붙이는 부업을 할 때만 해도 내핍을 하며 살다보면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날이 오리라 희망을 가졌었다. 우리들의 선배들을 바라보며 우리도 40대 중반쯤 되면 회사에서 중견 간부가 돼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리라 꿈꾸었다.

대기업에 취업하면 자녀 대학학자금에다가 유학비까지 제공해준다는 조건은 우리들의 미래가 탄탄대로를 걷게 될 줄 기대 했었다. 그리 될 줄 알고 휴일도 없이 일했어도 미래를 담보로 청춘을 불사를 수 있었다.

그런데 ‘사오정’(45세 정년퇴직)이라는 신인류를 만나게 될 줄이야... 집으로 돌아온 신인류는 ‘삼식이’(하루 세끼 집에서 먹는 퇴직자), ‘육시랄x’(세끼 식사에 세끼 간식까지 먹는 자)이라고도 불렸다. 시대 현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이런 비속어들을 나는 고스란히 체험하며 생계 해결까지 해야 하는 이중고를 겪게 됐다.

남편은 47세에 명퇴를 당했는데, 큰 아이가 중3때였다. 대학교 학자금은 고사하고, 중3, 중1, 초4 아이들이 줄줄이 사탕인 가장을 회사에서 제발 나가달라고 본인 책상을 치워버렸다. 회사로서는 생존하기 위한 자구책이었지만 당시 나는 혼비백산했다. 세상이 원망스럽고, 회사가 야속했고, 내 인생에 한숨이 절로 나왔었다. 격랑이 휘몰아치는 바다에 온가족이 쪽배를 타고 내몰린 느낌이었다.

제주도 귤밭이 꽃밭으로 보여 전세자금으로 덜컥 귤밭을 샀었지만 농사에 문외한이고, 어떤 연고도 없는 제주도에서 결코 낭만스러울 수 없는 상황에 놓였음에도 나는 귀농으로 방향을 틀었다.
귤밭을 처음 장만할 때만도 농사를 짓기보다는 귤밭에 토종닭들을 풀어놓고, 귤나무 아래에 테이블을 놓고 자연·건강 식당을 해볼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농사로 세 아이들을 대학까지 보낼 수 있을까가 자신이 없어서 자연·건강 식당을 생각했었는데, 남편이 명퇴하기 전 미리 3년간 농사연습을 한 나는 ‘저녁이 있는 삶’을 알게 됐다.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고, 해질녘이면 집으로 돌아와서 아이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뒹굴 수 있는 삶. 일단 아이들이 대학을 들어갈 때까지 만이라도 아이들과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는 농부로 살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명퇴해 집에 돌아온 남편 ‘삼식씨’는 모든 낙을 먹는데 집중했다. 삼시세끼 진수성찬을 해다 바쳐야하는 신세가 된 나는 또 다른 고행에 직면했다. 아침 먹고 돌아서면 점심 때, 또 저녁 때... 내 머릿속은 끼니마다 뭘 해먹을까가 고민이었다.
“하루 종일 먹는 생각만 하다니... 내가 돼지 사육사가 됐나?”
남편을 ‘일식씨’로 만들기까지의 나의 지난한 귀농일기는 또 다른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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