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광희 칼럼 - 누리백경(百景)(172)

‘뒤뜰안 정갈하고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은 장독대, 그리고 그 위에 줄지어 앉은 도개그릇들의 차림새나 그 언저리에서 풍기는 장내음만 가지고도 그 주부의 살림솜씨나 그 집안 가도(家度, 집안의 법도나 수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고들 말한다. 말하자면 장독대는 마치 뒤뜰안에 자리잡은 그 집안가도를 보이는 보임새 같은 것이기도 해서 예전부터 한국의 주부들은 이 장독치레를 자랑삼아 왔다.’
- 최순우(崔淳雨, 1916~1984), <한국의 멋-후원과 장독대>(1973) 중에서

꼭 그런 법도 있는 규모 있는 집안이 아니어도 예전의 우리 선조 할머니들은, 10년 혹은 100년이나 묵은 손에 길든 장독 속에, 10년 혹은 100년 묵은 진하고 값진 씨간장을 불씨처럼 영적 혼을 가지고 대대로 지켜왔었다.

옛문헌 <규합총서>(1809, 빙허각 이씨)의 기록에 보면, ‘장은 팔진(八珍)의 주인으로… 만일 장맛이 사나우면 비록 진기하고 맛난 반찬일지라도 능히 잘 소화치 못할 것이니, 어찌 중하지 않겠느냐?’며 그 소중함을 일깨웠다.

장(醬)으로서는, 음력 정월(올해는 양력 2~3월)에 담그는 정월장을 으뜸으로 쳤다. 일년 사시사철 중 날씨가 가장 추워서 장이 숙성되는 동안 장맛이 쉬 변하지 않고, 더욱 깊어지기 때문이다.
장 담그는 일은 ‘침장(沈醬)’이라 해 한 해 농사의 시작으로 생각했다. 조선조 후기 정학유의 <농가월령가> 11월령(음력)에 보면, ‘여자들아 네 할 일이 메주 쑬 일 남았구나 / 익게 삶고 매우 찧어 띄워서 재워두소’하고 당부하고 있다.

장 담그는 일의 시작은, 메주 쑤는 일부터다. 물에 잘 일어낸 메주콩을 큰 가마솥에 넣고 푹신 삶는다. 메주 쑤는 날은 일대 집안의 경사 같은 큰일이었다. 그 삶은 콩의 구수함이라니… 가뜩이나 궁궁한 시골 조무래기들의 시장기를 더했다. 그렇게 삶은 콩을 짓찧어 목침덩이처럼 모나게 짓는다. 이 메주덩이를 짚으로 엮어 바람이 서늘서늘 잘 드나드는 마루나 대청시렁, 처마밑에 매달아 띄운다.

이렇게 잘 만들어진 메주와 간수를 쏙 뺀 천일염(소금), 그리고 물을 준비해 ‘손 없는 날’인 말날[오일-午日]혹은 돼지날[해일-亥日]에 장을 담근다. 장항아리에 넣은 뒤에는 불순물 제거용 참숯과 마른고추, 대추 한움쿰을 맨 위에 띄워 마무리한다.

장을 담그고 나면, 4월경 장을 뜰 때까지 보통은 40~60일 기다림의 시간만 남는다. 이때는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부정타지 않게 해 주십사~” 천지신명께 밤낮으로 치성드리는 마음속 기도의 날들이다.

그러나, 이젠 활짝 핀 신문명 덕분에 정월장이니 이월장이니, 장맛이 짜니 싱겁느니 하는 걱정 없이 언제라도 입에 착착 달라붙는 맛나는 간장·고추장을 사먹을 수 있는 세상이니, 애써 말해 무엇하랴 싶기도 하다. 애초에 모르고 자랐으니 아쉬울 것도 없을 것이다.
다만, 살면서 우리 삶의 문화를 지탱해 온 고유의 옛 전통과 정신,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는 ‘청맹(靑盲)과니’ 세상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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