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명견 교수의 재미있고 유익한 옷 이야기(97)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미래를 준비하며
자신의 일에 최선 다한
장수의 의미 생각한다..."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피에르 가르뎅(Pierre Cardin)이 지난 연말 세상을 떠났다. 98세였다. 1922년 이탈리아 출생으로, 어려서 부모와 함께 프랑스로 넘어와 14살 때에 처음 바늘을 잡으면서 그는 운명과 마주했다.

1944년 파리의 유명디자이너 문하생으로 영화 의상 제작에 참여하다 장 콕토 감독의 ‘미녀와 야수’(1946년) 의상을 만들면서 그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28세에 독립해 자신의 패션 하우스를 설립하고, 1950년대 말 최초 기성복 쇼를 통해 고급 패션을 중산층으로 확대시키면서 패션계의 비상한 주목을 받았다. 1960년대 우주시대가 열리자 이에 발맞춰 공상과학소설이나 우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우주시대 룩(space age look)’으로 우주복 스타일 같은 미래적이고 전위적인 디자인들을 선보이며 세계적 명성을 쌓았다.

영국 록그룹 비틀스의 칼라 없는 정장도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그의 작품 중 하나다. 혁신적인 그의 디자인은 프랑스 여배우 브리짓 바르도에서부터 미국 퍼스트레이디 재클린 케네디, 미국 여배우이자 가수인 라켈 웰치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수많은 유명인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피에르 가르뎅은 디자이너일 뿐 아니라 타고난 사업가였다. 전 세계에 유통되는 다양한 상품에 자신의 이름을 사용한 최초의 디자이너였다. 즉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화한 원조로서, 라이선스 사업으로 세계적 판매망을 구축했다.

최고 전성기로 평가받는 1970~ 1980년대, 손목시계와 만년필, 침대시트 등 수천 개의 제품군에 그의 이름이 적용되고, 세계 10만개 매장에서 관련 제품들이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일찍이 동양문화에도 관심을 가졌던 그는 1958년 일본 여행을 통해 문화복장학원의 명예교수직도 받고 곧바로 일본시장에 진출했다. 냉전시대에 서양인 최초로 북경 자금성(1979년)과 소련 모스코바의 심장인 붉은 광장(1991년) 등에서 컬렉션을 연 것으로도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1982년 서울에서도 컬렉션을 발표하면서 한국과도 인연을 맺었다.

피에르 가르뎅은 2012년 7월 90세의 나이에도 작품 발표회를 하며 “나는 아직 내일을 위한 가솔린(에너지)을 갖고 있다”고 했고, 아흔 여섯의 나이에도 중국 만리장성에서 패션쇼를 열었다. 당시 여전히 일을 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매일 일하는 것이 내가 살아 존재하는 이유”라 했다. “영감을 받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내 작품을 남긴다. 이것은 세계 패션계에 남기는 내 유산”이라며 노년에도 활발한 활동으로 패션산업을 주도했다. 동시에 차세대 ‘유행선도자’를 발굴해 내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특별히 그의 업적은 미래지향적이고 창의적인 작품들로 패션계에 독특한 예술적 유산을 남긴 공도 있으나 맞춤옷 위주의 시장에서 기성복을 선보이며 대량생산을 통한 패션의 대중화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점을 뺄 수 없다.

오래 사는 것은 인간의 꿈이며 목표이지만, 어떤 사람의 장수는 인류의 대재앙이 될 수도 있다. 100세를 바라보면서도,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미래를 준비하며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한 피에르 가르뎅의 장수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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