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자매네 반디농장 김영란의 전원일기 ⑧

"낭만·로망이란 말은
농부 앞에서 금기다.
그래도 농부 삶을 사랑한다."

눈 쌓인 한라산을 쳐다보면서 ‘언제 저 눈바람이 흰 망토를 휘날리며 달려 내려와 귤밭을 휘저을까’를 가늠하며 카운트다운을 세고 있었다. 한파 오기 전에 일찌감치 귤을 다 따고 두 다리 뻗고 잠자면 되는 것을. 아슬아슬하게 날짜를 세가면서 강력 한파 오기 직전까지 버티는 강심장. 밤낮의 기온차를 활용해 최대한 당을 끌어 올리고, 면역력이 강한 귤을 만들어 보고자 시도하는 내 식의 수확 방법이다.

드디어 초강력 한파 예고에 비상등이 켜졌다. 제주도가 영하 3도까지 내려가면 나무에 달린 귤은 동사한다. 영하 1~2도까지는 껍질이 얼었다가도 햇볕을 받으면 다시 살아나지만 영하3도까지 가면 회생 가능성이 없다.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다가 몇 번 얼린 경험이 있어서 이제는 어느 정도가 마지노선인지를 알기에 이번 주에 밀려온다는 초강력 시베리아 한파는 가슴을 옭죄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머뭇거리면 귤이 언다고 생각하니 밤에 랜턴을 켜고라도 다 구출해내야 할 것 같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제목처럼 내 귤들을 구출하기 위해 이웃 지인들에게 긴급구호요청을 한다. 이미 수확을 다 끝내고 곤한 몸을 달래고 있는 이웃에게 “만사 제치고 우리 귤 따주세요~” 하니 차마 거절하고 싶어도 딱한 이웃을 뿌리치지 못하는 마음에 쐐기를 박는다.

“안 도와주면 제 명에 못 살거야~” 이런 애교서린 협박도 통하는 이웃이 고맙다. 아기 고사리 손이라도 없나... 두리번거리는데 때마침 어제 제주 한 달 살이 하러 왔다고 지인이 전화를 해왔다.
‘체험! 삶의 현장’을 경험하게 해 줄 테니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그렇게 하루사이에 귤 따는 사람 9명이 됐다. 이럴 때는 인해전술이 최고다. 무조건 손이 많아야 한다. 대략 250번의 가위질을 해야만 10㎏짜리 귤 한 상자를 딸 수 있다.(귤 한 개 따는데 가위질 두 번) 선수(?)들은 하루에 대략 40~50박스를 따지만 초보는 절반만 해도 무조건 손이 많아야 하는 게 귤 따는 일이다.

일기예보가 오전 중 비 올 확률이 60%라고 하고, 내일부터 영하 2도, 모레는 영하 3도란다. 이런 예보라 혼비백산할 지경이지만 나는 정신을 집중해서 마음장풍으로 비구름 밀어내기 전술을 쓴다. “비구름을 북쪽으로...” 온 마음을 다해서 밀어내며 “오늘 비 내리지 않게 해주세요~” 긴급할 때만 쓰는 기도까지 쓴다.(태풍 올 때마다 쓰는 기도) 날라리 신자의 간절한 기도에 하늘이 응답해 주셨는지, 북쪽 하늘은 먹구름이 가득한데, 우리 귤 밭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천사들이 모두 달려와서 귤을 따는지라... 여기만 비가 피해가서(다른 곳은 내렸다 함) 하루 종일 대충 상품귤을 건졌다. 남은 것은 내일 남편과 둘이서 구출하면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을 것이다. 남편의 일은 귤 딴 바구니를 컨테이너에 옮겨서, 트럭에 옮겨 싣고, 다시 창고에 저장하는 일이다. 인간 기중기가 돼서 하루 종일 몇 톤을 두 팔로 들고 내린다. 그 노동 강도를 아는 나는 밤새 잠을 설치며 뒤척이는 남편이 안쓰럽다.

이런 날은 결연해진다. 삶이 숭고해진다. 낭만? 로망? 그런 말은 농부 앞에서 금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부의 삶을 나는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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