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의 트로트 -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32> <모정의 세월><흙에 살리라>

남인수 1000여 곡, 백년설 500여 곡, 이난영 500여 곡·이미자 (데뷔 60년차) 2500여 곡, 나훈아(데뷔 52년차) 2600곡…
우리나라 가요계에서 손에 꼽는 유명 가수들이 가수인생 한 생애동안 불러 세상에 남긴 노래 곡수다.(물론 히트곡 수는 조금 다르다.)

그런가 하면, 47년의 노래인생동안 단 한 곡의 히트곡만으로 가수생활을 영위해 오고 있는 가수가 있다. 1973년부터 <모정의 세월>만을 부르고 있는 한세일과 역시 1973년부터 <흙에 살리라>만을 줄창 부르고 있는 홍세민이 그 장본인이다.

 

(1) 한세일 <모정의 세월>

▲ 한세일의 <모정의 세월>앨범

          <모정(母情)의 세월>

1. 동지섣달 긴긴 밤이 짧기만 한 것은
   근심으로 지새우는 어머님 마음
   흰머리 잔주름이 늘어만 가시는데
   한없이 이어지는 모정의 세월
 * 아~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이 일듯
   어머님 가슴에는 물결만 높네

2. 길고 긴 여름날이 짧기만 한 것은
   언제나 분주한 어머님 마음
   정성으로 기른 자식 모두들 가버려도
   근심으로 얼룩지는 모정의 세월
 * 아~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이 일듯
   어머님 가슴에는 물결만 높네

                     (1973, 신봉승 작사 / 박정웅 작곡)

 

▲ 한세일의 방송(가요무대) 출연모습.

‘이 세상 모두의 어머니들의 삶’ 앞에서 듣는 이들 모두를 침묵케 하는 절절한 사모곡이다.

애초 나훈아가 부른 드라마 주제곡
한세일(69세)의 본명은 박현진. 전남 광주 출신으로 야구명문 광주상고를 나왔다. 고교졸업 후 1972년 <산비둘기>란 곡으로 데뷔했으나, 그닥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 김세윤·안옥희·김영애 주연의 티 비 씨(TBC) 드라마 <어머니> 주제가로 나훈아가 불렀던 <모정의 세월>을 리메이크 해 불러 대히트를 치면서 ‘롱~런’ 길에 들어섰다. 당시 창법(특히 고음)이 나훈아와 비슷해 ‘제2의 나훈아’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 <모정의 세월> 원곡가수 나훈아의 앨범

그 길로 1973, 1974년 연거푸 2년간 각 방송사 신인상과 10대 가수상을 휩쓸었다.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47년간 오직 이 한 곡의 노래 만으로 줄기차게, 여전히 인기가수 생활을 영위해 오고 있다.

이 노래는 KBS <가요무대>가 방송 35주년을 기념해 방송횟수를 총합해 선정한 ‘애창곡 100선’에서 당당히 15위에 올라 그 인기도를 실감케 했다.
인생의 황혼녘에 접어들어 칠순을 목전에 둔 한세일은, 지금도 <모정의 세월> 만으로 노래밥을 먹고 산다.

 

(2) 홍세민 <흙에 살리라>

▲ 홍세민의 <흙에 살리라> 데뷔 앨범

            <흙에 살리라>

1. 초가삼간 집을 짓는 내 고향 정든 땅
   아기염소 벗을 삼아 논밭길을 가노라면
   이 세상 모두가 내것인 것을
   왜 남들은 고향을 버릴까 고향을 버릴까
   나는야 흙에 살리라 부모님 모시고
   효도 하면서 흙에 살리라~

2. 물레방아 돌고 도는 내 고향 정든 땅
   푸른 잔디 베개 삼아 풀내음을 맡노라면
   이 세상 모두가 내것인 것을
   왜 남들은 고향을 버릴까 고향을 버릴까
   나는야 흙에 살리라 내 사랑 순이와
   손을 맞잡고 흙에 살리라~

                                (1973, 김정일 작사/ 작곡)

 

▲ <흙에 살리라>를 부른 홍세민

이 노래는 1960~70년대 도시화·산업화·근대화로의 국가개발시대에 ‘무작정 상경’으로 농촌을 떠나는 이농(離農)현상이 러시를 이룰 때의 안타까운 농촌모습을 노래주인공의 독백형식으로 그렸다. 당시의 시대상 한쪽이 읽히는 건전가요풍의 노래다. …초가삼간, 아기염소, 물레방아, 푸른 잔디, 풀내음, 순이… 정든 땅 내 고향을 왜 버리고 떠나느냐고 묻는다.

이 노래 역시 KBS <가요무대> 방송 35주년 기념 방송횟수 집계 ‘애창곡 100선’에서 47위에 올라 시청자들의 노래 선호도를 가늠케 했다.

이 노래로 작곡가는 ‘건전가요상’ 받아
홍세민(71세)은 전남 해남 출신으로 서울의 동대문상고와 동양공전(전기과)을 나왔다. 자신은 비교적 일찍 고향을 떠나왔다. 1972년 서정우라는 무명가수가 부른 이 노래를 다시 리메이크 해 히트시키면서 47년간의 ‘롱~런’ 길에 접어들었다.

▲ 홍세민의 행사 출연모습

이 노래를 작사·작곡 한 김정일(1943 ~  )은 중앙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서울 출신인데, 이 노래를 만들기 전 직접 시골에 내려가 ‘농촌체험’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이 노래로 ‘건전가요상’을 받았다.

홍세민은 이 노래 한 곡 만으로 47년간 유명가수로 방송이며 각종 행사장에 초청돼 열창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모르긴 해도 그의 다리 힘이 붙어있는 한은 <흙에 살리라> 노래는 우리 곁에서 멀어지지는 않을 성싶다.

 

 

 

 

1950년 6.25전쟁으로 잠시 움츠러 들었던 음반산업은 1951년 하반기부터 다시 움직이면서 서서히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우리 대중음악의 재건을 의미하기도 했다.
애초 레코드 음반의 보급은 1920년 일제 조선총독부 사이토 총독의 ‘식민지 조선에서의 문화정책’ 표방이 시발이 됐다. 일본은 국제적 선전 목적의 하나로 레코드 음악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게 했다.
이때 우리나라 최초로 일본에 건너가 노래(<사의 찬미>·1920)를 취입한 이가 소프라노 윤심덕이었다. 이 무렵부터 일본에 본사를 둔 일본 레코드사들이 앞다퉈 가며 우리나라에 전속가수를 두고 일본에 보내 유행가를 취입하게 했다.

▲ 빅터레코드사 음반 라벨. 노래듣는 바둑이 개 ‘니퍼’를 트레이드 마크로 써서 유명해졌다.

미국계의 빅터와 컬럼비아 레코드, 독일계의 포리돌 레코드 등 3대 메이저급 레코드사에 일본계의 시에론 레코드와 오케 레코드, 그리고 태평 레코드가 가세해 ‘6대 레코드사’가 치열한 시장경쟁을 펼쳤다. 이와같은 음반산업의 활성화와 함께 그만큼 우리의 대중음악 트로트는 양적·질적 풍요를 누리게 됐다.

이 레코드사들은 각각 전속작곡가와 전속가수, 전속경음악단 체제를 갖추고 불꽃 튀기는 경쟁을 펼쳤다.
▲빅터 레코드- 전수린·홍난파·김교성·이애리수·선우일선·왕수복·박단마·황금심·장석연
▲태평 레코드- 이재호·백년설·백난아
▲컬럼비아 레코드- 채규엽·손목인·고복수·전옥·석금성
▲오케레코드- 박시춘·김해송·이화자·이난영·고복수·장세정·김정구

이러한 초기의 레코드사 체제는 다시 신세기·오아시스·도미도·미도파·유니버살·킹스타의 6대 국내 음반사로 재편돼 1958년 최초 국산 LP음반을 생산(신세기 레코드) 해 내면서 춘주전국시대를 방불케 했다. 이때의 각 레코드사 대표 히트곡들을 보면, 당시의 상황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신세기: 박재홍<울고 넘는 박달재> ▲오아시스: 송민도<나 하나의 사랑> ▲도미도: 김정애<앵두나무 처녀> ▲미도파: 방운아<여수 야화> ▲유니버살: 백설희<아메리카 차이나 타운> ▲킹스타: 남인수<무너진 사랑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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