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의 트로트-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31> 1970년대를 풍미한 조미미

▲ <서산 갯마을> 노래비(2010, 충남 서산시 지곡면 왕산포구 소재)
▲ 전성기 때의 조미미 모습

애수어린 정조 깊이있는 음성에 담아내
1960년대 초 명랑·쾌활·발랄한 스탠더드 팝 스타일의 노래들(이를테면, 한명숙이 부른 <노란 샤쓰의 사나이>, 최희준의 <우리 애인은 올드 미스> 등)에 밀려 주춤하던 전통트로트는, 1960년대 중반 <동백아가씨>(1964)의 대히트를 계기로 눈물과 탄식이 배어나는 ‘청승스러움’과 촌스러운 시골이미지를 다시 한껏 보여주며 되살아났다.

이 트로트 부활의 주역은 단연 이미자였고, 그 한발짝 뒤에서 트로트의 ‘시골이미지’를 시골스럽지 않고, 슬픔 또한 아주 슬프지는 않게 짜랑짜랑, 쫀득하면서도 교태스럽게 노래한 가수가 조미미(曺美美, 1947~2012)였다.

한 문화평론가는 “조미미는 이미자가 인기를 얻은 직후에 나왔지만, 창법은 어느 정도 닮아 있다. 그러나 단조 중심의 이미자 노래와는 달리 <서산 갯마을>, <바다가 육지라면>처럼 덜 비극적인 장조의 노래가 많아 교태스럽고 묘한 섹시함조차 느낀다”고 평했다.
분명 조미미는 애수어린 정조를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끌어올려 되새김질 해 토해내는 아름답고 깊이 있는 음성에 담아냈다. 그야말로 ‘뽕짝 본색’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바다가 육지라면>

1. 얼마나 멀고 먼지 그리운 서울은
   파도가 길을 막아 가고파도 못갑니다
   바다가 육지라면 바다가 육지라면
   배 떠난 부두에서 울고 있지 않을 것을
   아~바다가 육지라면 눈물은 없었을 것을

2. 어제 온 연락선은 육지로 가는데
   할말이 하도 많아 목이 메어 못 합니다
   이 몸이 철새라면 이 몸이 철새라면
   뱃길에 훨훨 날아 어디론지 가련마는
   아~바다가 육지라면 이별은 없었을 것을

                                 (1970, 정귀문 작사/ 이인권 작곡)


이 노래는 작사가 고 정귀문이 1969년 고향인 경주시 감포읍 나정리 앞바다에서 파도가 일렁이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어두운 현실을 벗어나 보다 나은 미래에의 꿈을 그리며 노랫말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조미미는 데뷔 5년 만에 이 노래의 빅히트로 정상에 오르게 된다.

<서귀포를 아시나요> 음반 판매 100만장 기록
조미미는 전남 영광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자라면서 목포여고를 나왔다.
그녀는 한 마디로 ‘끼’가 많았던지 이미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64년 목포방송국 주최 전국가수콩쿠르에서 1등을 했다.

▲ <서귀포를 아시나요> 노래비(2009, 제주 서귀포시 소재)

그리고 18살 때인 1965년 동아방송 가요백일장에서 입상, 김세레나·김부자와 함께 동아방송 전속가수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가수의 길을 걷게 됐다.

이때 본명이었던 ‘조미자’가 같은 레코드사에 전속된 이미자와 혼동된다 해 그녀의 데뷔곡 <떠나온 목포항>(1965)을 작곡한 김부해가 ‘조미미’로 예명을 지어줬다.
데뷔곡 <떠나온 목포항> 이후, <여자의 꿈>(1969)으로 차분하게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 <서산 갯마을>, <선생님>(1970.4)-<바다가 육지라면> (1970.9)으로 차근차근 다져가며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1971·1972년 2년 연속 <먼 데서 오신 손님>, <단골손님>으로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 10대가수에 뽑히며, 최고 인기가수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또한 1972년에는 오은주의 <내 고향 서귀포>를 리메이크 해 부른 <서귀포를 아시나요>를 크게 히트시키며 밀리언셀러 음반(100만장 판매)을 기록해 그녀의 대중적 인기를 실감케 하기도 했다.
그외에도 <선생님>, <동창생> 등 기억될 만한 히트곡들이 있고,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13장의 앨범을 남겼다.

 

            <서산 갯마을>

1. 굴을 따랴 전복을 따랴 서산 갯마을
   처녀들 부푼 가슴 꿈도 많은데
   요놈의 풍랑은 왜 이다지 사나운고
   사공들의 눈물이 마를 날이 없구나

2.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서산 갯마을
   쪼름한 바닷바람 한도 많은데
   요놈의 풍랑은 왜 이다지 사나운고
   아낙네들 오지랍이 마를 날이 없구나

                     (1966, 김운하 작사 / 김학송 작곡)

 

▲ <바다가 육지라면> 노래비(2009, 경주시 감포읍 나정 해수욕장 소재)

경주·제주·서산에 노래비 세워져
조미미는 후덕스러운 인상을 가져서인지 노래의 인기 만큼이나 부산한 스캔들로도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남진과는 전라도 목포라는 동향의식 때문인지 순식간에 가까워져 당시 해병대원으로 월남전에 참전하고 있던 남진이 “귀국하는대로 약혼한다”고 발표해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다.

또한 남진과 라이벌 구도가 형성돼 있던 나훈아와는 나훈아의 자작곡 <사랑은 장난이 아니랍니다>를 받아 부르면서 뜨거운 사이로 발전해 세상의 뉴스거리가 되기도 했다.

▲ 세상을 떠나기 전, 만년의 방송(가요무대)출연 모습

그러나 그런 동네방네 스캔들을 불식시키며 1973년 재일교포 사업가와 결혼, 일본으로 건너가 평범한 주부로 살다가 2010년에 완전히 귀국해 간간이 방송활동을 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기도 했다.
그런 그녀에게 간암 진단은 청천벽력같은 죽음의 선고였다. 결국 병마를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2012년 경기도 오류동 자택에서 66세로 한많은 세상을 떠났다.

조미미의 노래비는 1.<바다가 육지라면>(2009, 경주시 감포읍 나정해수욕장) 2.<서귀포를 아시나요>(2009, 제주 서귀포시) 3.<서산 갯마을>(2010, 충남 서산시 지곡면 왕산포구) 등 전국 세곳에 세워져 있어, 그녀는 가고 없어도 더이상 외롭지는 않다.

(※ 가수 주현미가 조미미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울면서 실토한 에피소드 하나.- 자신이 가수가 될 수 있었던 계기가 된 <쌍쌍파티>테이프 녹음 때, 원래는 조미미가 노래하게 돼 있었는데 녹음을 앞두고 조미미가 나타나지 않고 스케줄 펑크를 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대타로 녹음하게 됐다며, 늘 무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 우리나라 최초의 전축-천일사 ‘별표전축’

‘전자산업의 총화’로 불리는 전축(電蓄)은 ‘전기축음기’의 약자다. 축음기는 1899년 미국의 에디슨이 발명했다.
1960년대 초기 우리나라에 보급되기 시작한 전축은 라디오 수신기에 LP(엘피) 음반의 소리를 재생시키는 턴테이블이 함께 조립된 형태인데, 일제시대의 유성기를 대체하는 컴포넌트 오디오 시스템으로 정착됐다.

이 시기 전축의 대표적인 모델은 천일사의 ‘별표 전축’과 성우전자의 ‘독수리표 전축’이었다.
‘별표 전축’의 천일사는 서울 수복 직후인 1952년 서울 종로 2가 파고다공원 옆에 50평 정도 점포를 얻어 설립했다.

당시 정봉운 창업주는 육군장교 제대 후 광장시장에서 포목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소리나는 전자제품이 모두 외국제 밖에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50여 명의 직공을 모아 국내에서 처음으로 전축을 조립 생산해 내기 시작했다.
이 천일사는 1970년대 전자기기 붐을 타고 획기적 발전을 했는데, 1978년 경영권이 섬유제조업체인 태광산업으로 넘어가 ‘에로이카’ 브랜드를 생산하다가 2005년에 문을 닫았다.

‘독수리표 전축’의 성우전자는 공군사관학교(3기)를 나온 통신전자 장교 출신으로 소리를 전공한 조소하 창업주가 미국유학 후 군 복무 중이던 1960년 부업으로 서울 광교에 차린 전파사가 모태가 됐다. 이후 1966년 군 예편 후 서울 이문동에 공장을 차리고 본격적으로 전축을 만들기 시작했다.

1973년에는 국내 최초로 8트랙(track) 스테레오 전축을 개발하면서 동남아 시장에 전축을 처녀 수출했다. 성우전자는 한때 종업원이 1300명, 월 생산 전축이 9000대에 달했을 정도로 사세가 짱짱했으나, 국내 전자산업환경의 변화에 따라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 외도 활표·바이킹·엠파이어 등의 후발주자들이 국산 전축을 생산 판매하면서, 한 해 최고 생산량이 90만대(1978년)에 이르던 최전성기에 각축을 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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