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수필-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억새도 흐느끼는데
그 마음 모르는지
서쪽 하늘에 노을만
붉게 타오르고 있다."

북인디언 원주민들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부르는 11월이다. 사라질 것은 다 사라지고 돌아갈 것은 서둘러 돌아가는 달이란 말인가. 왔던 건 가고야 마는 것이 정한 이치니. 산새 한 마리가 가을 속으로 사라진다. 이미 갈 때를 놓칠세라 서두르는 빛이 역력하다.

쌀쌀하게 쨍한 늦가을, 묻혀 있던 논둑이 구불구불 제 모습을 드러내고, 아득한 하늘 아래 추수가 끝난 논배미가 휑하다. 며칠 사이에 농원에 황금빛으로 물든 배나무 잎이 모두 떨어져 낙엽은 눈이 되고 비가 되고 바람이 돼 천지사방에 흩어 날리고, 갑자기 텅 빈 나뭇가지에 빈자리는 메울 수 없이 커져버렸다. 빈 나뭇가지가 무너져버린 것들을 배경으로 무당거미의 그물망을 직조하는 삶만이 여전히 팽팽하고 가파르다.

햇빛은 비스듬히 벽을 타고 내려와 마룻바닥에서 최대의 크기가 됐다가 맞은 편 벽을 타고 창밖으로 나간다. 길어야 두어 시간 크기도 줄어들었다. 앞산마루엔 이미 반 뼘 햇살만 남았고, 소슬바람은 땡그랑 빈통을 울리고, 가랑잎 바스락거리는 소리 밟으며 뒷담 너머 산 밑의 밭을 오른다.

성치도 않은 허리로 한 쪽 다리를 절어도 모든 게 사라지기 전에 가을을 더 보고 싶다. 나는 여기 저기 돋아난 가을냉이를 캐 담는다. 아직 해묵지 않아 향이 약한 듯해도 봄을 기다리기엔 너무 멀지 않은가. 바구니 들고 허리를 펴 일어서 내려다보니 문득 목도강가에 억새가 그렇게 무성할 수가 없다. 강을 따라 길게 그 넓은 강변을 가득 메우고 스러지는 가을 햇살을 받아 은백색으로 빛나는 발레리나처럼 밀려오는 바람 따라 물결처럼 일렁이고 휘몰아치고 일제히 드러누웠다 소스라치고 일어나는 그 억새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군무를 넋을 놓고 바라봤다. 사는 일이 쉽게 물리지 않는 것은 오늘 같은 억새의 군무를 보는 환희의 순간이 남기는 여운 때문일지도 모른다.

옛날에 목도강(달천강)은 남한강 상류여서 뱃길로 한양에 소금과 쌀을 실어 나르는 포구가 있었고 창고가 있던 곳으로, 지금도 우리 마을 이름이 역사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유창리(有倉里)다. 소백산맥의 산세가 유달리 험준한 괴산의 우리 마을은 육로가 발전하기 전 한양과 물물교환을 하게 됐을 때 목도강 물길 따라 나라(정부)의 수세창고가 있었던 곳이다. 고려 때부터 조선조까지 하동창(下東倉)의 소재지로 8칸 창고에 93석의 쌀을 보관했다는 기록(동국여지승람)이 있다. 이곳에 세곡을 모아 저장했으며 연초, 곡물, 장작 등을 한양으로 보냈고 소금 명태 등 해산물을 한양서 실어오는 빈번한 교류가 있었던 곳이다.

무리지어 핀 물억새와 갈대는 몰아치는 바람벽에 몸을 비벼대며 문질러 하얗게 속살이 부풀어 올랐다. 여름내 갈대숲을 드나들던 철새들도 다 떠나가고 해질녘 누군가의 색소폰이 목이 쉬도록 길게 우는 강가. ‘갈대의 순정’ 트로트 멜로디 한 자락이 애절하다. 지금도 그 어디에 포구의 흔적이 있어 그때나 이때나 남기고 가는 사람, 보내고 남은 사람의 눈물이 강물에 넘쳤으리라.

고려 때 정지상의 송별시가 새삼 떠오른다.
//비 갠 긴 둑엔 풀빛이 짙어 가는데/ 남포에서 님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대동강 물은 어느 때 마르려는 지/ 해마다 이별 눈물 푸른 강물에 더해지네// 
떠나간 사랑을 부르며 사나이가 울고 갈대가 울고 억새도 흐느끼는데, 그 마음 아는지 모르는지 서쪽 하늘에 노을만 붉게 타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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