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토종종자로 식량주권 지키는 강원 횡성 여성농민회

FTA(free trade agreement, 자유무역협정)시대엔 희망과 불안이 동시에 존재한다. 무역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경제여건상 전자·자동차·반도체 산업은 FTA에 따른 수출 증대 등이 기회요인으로 희망이 되겠지만, 산업기반이 약하고 고령화된 한국 농업은 농산물 수입 개방화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내기 힘들어 FTA의 희생양이란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국내 농업도 세계화 개방화의 거스를 수 없는 환경변화 속에서 국내 농식품의 경쟁력을 향상시키고, 자구책을 강구해야 하는 큰 과제와 패러다임의 변화가 요구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에 농촌여성신문은 농림축산식품부와 공동으로 FTA를 위기가 아닌 기회로 생각하고 FTA를 활용해 국내산 농식품과 가공품으로 해외시장 개척에 도전하고 성과를 이뤄낸 선도 여성농업인들, 또 FTA에 대응해 국내산 농산물 소비촉진에 힘쓰며 우리 농식품의 경쟁력 향상에 앞장서는 여성농업인들의 활약을 10회 시리즈로 소개해 여성농업인들이 FTA시대를 슬기롭고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 김은숙 회장은 토종씨앗의 보존을 위해 여성농업인의 역할이 중요했다고 말하면서 후손에게 물려줘야 할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 한다.

종자는 과거‧현재‧미래 담긴 타임캡슐, 후손에 물려줄 책임
토종종자는 친환경농업과도 연계…식량자급 위해서도 중요한 존재
횡성군, 토종씨앗보유현황조사 진행…여성농업인이 보존에 큰 역할

지난 10년간 우리나라가 해외에 지급한 종자 로열티는 1357억 원에 달했다. 평균으로 따져도 136억 원으로 올해도 105억 원대로 추정되며 줄곧 100억 원대로 머물렀다. 종자강국을 목표로 야심차게 추진한 골든씨드 프로젝트(GSP) 역시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밑빠진 독에 물붓기라는 비판이 매년 이어지고 있다.

특히 코로나19로 촉발된 전세계적인 식량위기는 먹을 것이 곧 무기가 된다는 식량안보의 현실화를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그래서 새로운 종자의 개발과 보급 이상으로 한반도에서 오랫동안 전해져 온 토종씨앗을 지켜야 한단 목소리가 코로나19를 계기로 더 힘을 얻고 있다. 횡성군 여성농민회 김은숙 회장(49)은 그 중심에 있다.

▲ 강한 생명력을 지닌 토종씨앗은 식량자급 측면에서도 중요한 가지를 지닌다.

강한 생명력 품은 토종씨앗
“옛날 씨앗들은 올해 수확하고 내년에도 심어도 될 정도로 생명력이 강했어요. 저도 시어머님이 키우던 토종파를 물려받았어요. 엄마가 딸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물려주던 게 토종씨앗이었는데 지금은 경제논리 때문에 자취를 감춘 게 많아요. 그래서 자손들에게 하나라도 우리 토종씨앗을 물려주기 위해 채종포는 너무나 중요한 땅이에요.”

김 회장이 물려받은 토종파는 서리가 내려도 꿋꿋하게 살아남는다고 한다. 즉 일년내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생명력이 강한 때문이다. 개량된 파는 꽃대를 자르면 움이 나오지도 않고, 겨울을 넘기지 못해 봄에 새로 심어야 하는 것과 차이가 난다. 이렇듯 생명력이 강한 토종파처럼 기후변화가 현실로 닥쳐온 이때, 왜 보존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된다.

강원도 횡성의 토종씨앗 채종포는 2012년 시작됐다. 횡성군농업기술센터 지원 아래 김은숙 회장은 채종포를 회원들과 함께 운영하고 있다. 봄에 개장하는 채종포는 매월 정기적으로 회원들과 함께 수시로 밭을 돌보고 가꾼다. 11월에 농사를 마무리하며 가장 좋은 씨앗을 고르고 골라 보관하고, 필요로 한 이들과 나눈다. 단 나눈 씨앗들은 다른 이들과 나누거나 다시 채종해 채종포로 가져와 다시 심는 게 원칙이다. 돈으로 매길 수 없는 생명을 품은 씨앗을 공유하는 셈이다. 마치 김 회장이 시어머니에게 토종파를 물려받았듯 그렇게 퍼져나갔으면 하는 바람으로 말이다. 채종포는 김 회원 혼자만의 힘으로 일궈지진 않는다. 토종씨앗에 대한 애착을 지닌 이들이 힘을 보탠다. 채종부터 매월 번갈아 경작하고, 수확, 그리고 갈무리까지 함께 한다.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채종포를 가꾸는데 힘들었어요. 사람 모이는 거 자체가 안됐잖아요. 그래도 회원들의 도움으로 올해도 농사가 잘됐어요. 11월 농업인의 날에 씨앗을 전시하고 행사를 해요. 수확이 끝나면 비닐 벗기고, 지지대 뽑고 밭을 정리하는 것까지가 다 저희 일이죠. 코로나로 코로나지만 봄엔 미세먼지, 여름엔 땡볕, 그리고 올핸 비도 많이 왔잖아요. 올해 우여곡절의 연속이었어요.”

그렇게 힘들게 키운 수확물은 또다른 곳에서 토종씨앗으로 퍼져 나가기도 하지만 ‘언니네 텃밭’에서 전국의 소비자들과 만나기도 한다. 언니네 텃밭은 여성농업인들이 제초제를 쓰지 않고 토종농사로 지은 농산물을 꾸러미로 정기배송하는 서비스다. 땅을 살리고 다양한 종을 살리며 우리 몸을 지키는 건강한 행동이란 기치 아래 횡성 이외에도 도별로 소비자와의 거리, 지역안배를 고려해 공동체가 꾸려져 있다. 꾸러미 종류로 다양하다. 제철꾸러미, 1인꾸러미, 고향꾸러미, 요리뚝딱꾸러미, 채식꾸러미 등으로 세분화돼 있다.

▲ 주요품목의 연도별 로열티 지급액(2020년 수치는 예상치. 출처:더불어민주당 최인호 의원실)

토종씨앗 전수조사는 중요한 계기
횡성에서 토종씨앗 채종포를 비롯해 재래종을 지키는데 있어 지난 2014년 이뤄진 토종씨앗보유현황조사는 큰 변곡점이 됐다. 횡성여성농업인종합지원센터 한영미 센터장과 농촌진흥청 유전자원과장을 지낸 토종씨앗의 대부 안완식 박사 등이 주축이 된 현황조사는 재래종의 소멸이 급속히 이뤄지고 있어 수집과 확보가 시급한 일이란 생각에서 시작됐다.

10개월간 횡성군 전지역을 대상으로 실시한 현황조사는 토종씨앗의 자원화와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한 전초작업으로서 고령 여성농업인 위주로 진행됐다. 김은숙 회장처럼 여성들이 토종씨앗을 지키는데 있어 큰 역할을 하고 있어서다. 이렇게 수집된 토종씨앗은 농촌진흥청 유전자원센터로 보내져 검증을 거친 후 다시 횡성군의 토종자원으로 영구 보관됐다. 이때 수집된 토종씨앗은 84작물의 403점이었다. 식량작물이 12작물 197점, 채소가 27작물 109점, 특용작물 27작물 72점, 과수 25점 등이었다.

토종씨앗을 수집한 농가들은 오랫동안 농사를 지어온 경우가 많았다. 씨앗이 대물림되는 덴 오랜 농사가 함께였던 것이다. 특히 과수의 경우 100년 이상 대물림한 경우가 많았고, 대부분 농사경험이 30년 이상이었다. 성별로 보면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여성농업인의 비율은 무려 98%였다. 농가에서 씨앗을 관리하는 사람은 여성농업인이었던 것이다. 또한 고령의 여성농업인들의 오랫동안 씨앗을 보존하고 있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현황조사의 가치는 씨앗의 수집과 보존에만 있지 않다. 물론 횡성군은 토종씨앗을 미래 전략사업으로 육성하고자 현황조사를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또다른 의미가 있다고 김은숙 회장은 말한다. 바로 씨앗에 담겨있는 이야기다.

▲ 토종씨앗 채종포는 여성농업인과 전국에서 모인 봉사자들의 도움으로 지켜지고 있다.

우리네들의 이야기가 담겨
달면서도 물기가 많아 날것 그대로 깎아 먹어도 맛이 기가 막힌 물고구마를 간직해온 박부례 할머니는 10도 이하로 기온이 내려가면 얼어 버리기 십상인 물고구마를 무려 50년 넘게 길러온 분이라고 한다. 박 할머니는 자식과 손자들을 위해 큰 물고구마는 주고, 손가락처럼 가느다란 고구마는 싹을 틔워 키우는 노하우를 지닌 분이었다. 그 노하우란 게 불 때고 나온 재를 오줌과 갈잎, 개똥을 섞어 거름을 만들어 밭에 뿌린 후, 호미로 골을 파 마늘을 심고, 고구마 줄기와 검불을 덮어준다. 이듬해 마늘잎이 대여섯장 달릴 때 고구마를 심는 게 바로 그 요령이다. 한 밭에서 마늘과 고구마가 다투지 않고 함께 살아갈 수 있게끔 때를 맞춰 심는다는 박 할머니.

공근면 상창봉리 배영희 할머니의 돼지감자 이야기도 흥미롭다. 자주감자로도 불리는 돼지감자는 누구나 배를 곯던 1960년대 벼를 수확해 죽을 쑤워 먹어도 여름을 다 못버티던 때, 감자는 주식이었다. 돼지감자는 겨울에 땅이 얼기 전 씨앗보관을 잘하는 게 핵심이다. 무처럼 구덩이를 깊이 파 묻고 봄에 심어야 한다. 100년 넘게 한반도에서 식량구실을 톡톡히 해온 돼지감자는 새 품종이라면 씨앗을 바꾸는 요즘 시대에도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어 버리지 못했다고 한다.

“배 할머니네는 11남매였는데 한 대야나 되는 돼지감자를 깔 때 놋숟가락으로 시멘트 바닥에 끝을 갈아 껍질을 벗겼대요. 껍질을 벗길 때 하얀 녹말가루가 사방으로 튀니까 서로 쳐다보며 웃던 기억이 선명하시대요. 씨앗에 추억이 담겨 버리시질 못하고 수십년 키워오신 거죠.”

추억과 세월이 그리고 이야기가 담긴 토종씨앗은 그래서 더 소중하다. 그리고 웃어르신들의 노하우, 오로지 세월이 쌓여 쉬이 따라할 수 없는 지혜도 담겨있다.

“옛날분들은 씨받는 노하우가 다 있으시더라구요. 근데 그 노하우란 게 단박에 깨우치는 게 아니라 세월이 필요하더라구요. 오이씨를 받을 땐 물로 씻지 않으면 쓴맛이 나는네 햇빛에 잘 말려야 해요. 기계힘을 빌려 온도만 맞추면 되겠거니 생각하면 큰 코 다치죠. 자연의 힘을 빌려 그리고 귀찮지만 손이 많이 가야 좋은 씨를 받을 수 있어요.”

이렇듯 토종씨앗은 반만년의 역사와 현재가 담겨 있는 민족의 뿌리고 생명 그 자체다. 종자 한 톨에는 미래가 담겨 있어 가히 타입캡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류의 먹거리를 책임진다는 숭고한 책무를 충실히 실현하는데 있어 토종씨앗의 명맥을 유지하는 것은 산업적 가치와 문화적 유산으로서 대단한 가치를 지닌 것이다. 우리가 소중히 여기고 보존해야 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횡성여성농업인종합지원센터 한영미 센터장

“토종씨앗의 보존, ‘언니’들이 있어 있어 가능했다”

안완식 박사님과 함께 횡성의 토종씨앗 실태조사를 2014년 진행했다. 한번 소멸된 토종씨앗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살릴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사라지면 결국 지구에서 없어지는 것이다. 사라질 토종씨앗을 보전하는 건 여성농업인의 사명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실태조사는 의미가 크다. 집, 텃밭, 곳간에 감춰져 있던 토종씨앗을 400점 넘게 수집할 수 있었던 건 여성농업인들, 우리 ‘언니’들이 있어 가능했다. 국가가 아닌 지방자치단체가 나서 토종씨앗을 수집함으로써 잃어버릴 위기의 토종자원을 찾았다는 자부심도 크다.

대기업이나 해외에서 들여온 종자를 대체한다는 경제적 논리가 아니더라도 친환경농업, 신토불이의 가치, 그리고 코로나19에서 모든 국민들의 공감대가 만들어진 식량자급에 있어서도 중요한 존재다. 그래서 농업인뿐 아니라 국민 모두가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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