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 고재욱 작가

치매나 불치의 병으로 삶의 끝자락에 놓인 노인을 보살피는 요양봉사 일을 7년째 해오면서도 글 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은 고재욱 작가.
그는 그 동안 100여 명의 노인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을 지켜봤다고 한다. 고 작가는 치매노인들을 돌보며 함께 했던 추억과 대화를 ‘당신이 꽃같이 돌아오면 좋겠다’라는 제목의 책으로 펴냈다. 고 작가의 감동어린 요양봉사 얘기를 들어본다.

 

100여 노인 임종 지키면서
형언키 어려운 슬픔 느껴
좋은 데 가시길 빌어 보람도...

분양사업 실패로 노숙자 전락
“건축기사였던 저는 10여 년 전 빌라를 지어 분양사업을 했습니다. 그때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를 촉발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가 벌어져 쫄딱 망해 지었던 집이 경매로 넘어가고 말았죠. 좌절과 비관으로 마포대교에서 두어 시간 꼼짝 않고 한강을 바라봤어요. 그러다 목적지도 없이 무작정 걷고 또 걸어 다다른 곳이 영등포에 있는 노숙인 쉼터인 ‘광야홈리스센터’였어요. 그곳에서 겉은 멀쩡한데 속은 산산이 부서져 무기력한 눈빛을 지닌 노숙인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고 작가는 그곳에서 노숙인들의 죽음을 목격했다. 죽은 사람들이 화장 뒤 뼛가루가 섞이는 것을 보며 허망하게 삶을 마무리하는 그들의 참담하고 가련한 모습을 글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노숙인 소재의 작품 입상으로 작가길
노숙인을 돌보는 광야교회 목사는 어느 날 뜬금없이 노숙인들을 대상으로 한 독후감대회를 열었다. 이때 고 작가는 영국의 존 버니언이 쓴 ‘천로역정’이란 책의 독후감을 썼는데 1등을 했다. 그리고 그는 서울시가 개최한 문학작품 공모전에서도 1등을 했다. 글의 내용은 광야홈리스센터 근처 쪽방 부부의 이야기인데, 부인이 죽은 뒤 벌어진 일을 소재로 하고 있다.

지적장애를 가진 남편은 아내의 시신을 끌어안고 1주일을 보냈다. 뒤늦게 발견된 시신은 119대원이 수습했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가 덮었던 악취가 밴 이불을 두르고 방 한가운데 앉아있었다. 남편 주위엔 시계가 9~10개 흩어져 있었는데 시간은 제각각이었다.
고 작가는 그 처참한 모습을 보고 느낀 충격을 에세이로 썼다. 제목은 ‘고장난 시계’였는데, 엉켜진 삶을 풀며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를 담아 대상을 받았다. 이후 글쓰기는 그의 사명이  됐다. 그는 지금도 매일 요양봉사 중에 겪는 감동이야기를 메모했다가 틈날 때마다 글을 쓴다고 한다.

요양사자격증 취득해 본격 노인돌봄 나서
글을 쓰며 어느 정도 삶에 안정을 찾고 미래가 구체적으로 보이게 되자 그는 1년 반 만에 광양홈리스센터를 나왔다. 그는 막노동을 하며 전국을 떠돌다가 경기도 양평에 있는 캠핑장에 일자리를 얻었다.
평일에는 캠핑장에 손님이 없어 인근의 교회 내 작은 요양원에 드나들며 노인들을 돌봤다. 어느 날 한 할아버지가 직원들에게 목욕을 시켜달라고 떼쓰는 것을 본 고 작가는 자신이 나서서 목욕을 시켜드렸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가 다음날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부음을 접한 그는 자신과 같은 밑바닥 인생도 어려운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요양원의 노인들을 알뜰히 보살폈다. 이를 눈여겨 본 목사가 그에게 요양사 자질이 엿보인다며 학원비와 학원에 다닐 차를 내줘 요양 교육을 받고 자격증을 취득해 요양사의 길을 걷게 됐다.
치매노인은 기억상실에다 인지장애로 요양사가 노인을 도와준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서 이런 얘기를 했다.

“치매노인 중에는 요양사가 종으로 보이는지 말끝마다 ‘똥이나 치워주는 게 뭐가 잘났다고 하느냐’며 이유 없이 주먹질을 하거나 할퀴는 분들이 있습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은 이상행동을 보여 요양사들은 마음에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그러다가 정상인처럼 정신이 멀쩡해져 살아온 고달팠던 얘기를 해주는데, 그럴 때는 같이 울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마음을 추스르며 치매노인들을 잘 돌봐야겠다고 마음을 다잡게 되죠.”

부모님 요양원에 모시는 게 불효 아냐
고 작가는 자신이 돌보던 치매노인 중 세상을 떠난 한 할머니 얘기를 들려줬다.
“휠체어를 타시던 할머니는 고집이 엄청 세서 남의 얘기를 좀체 듣질 않았어요. 식당에 갈 때는 가장 먼저 가시려 했죠. 자신보다 식당에 먼저 들어간 분을 보면 화를 내며 때리기도 했어요. 이 할머니의 남편은 무능력해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할머니는 자녀 넷을 키우며 혼자 목장일을 했대요. 새벽 3시에 일어나 소똥을 치우고 소젖 짜는 일을 혼자 하느라 고생을 많이 하다 보니 남에게 뒤지지 않겠다는 고집이 몸에 밴 것이죠.”

고 작가는 또 다른 노인 이야기를 해줬다.
“87세의 멋진 할아버지였는데, 사진작가에다가 파리에서 미술공부를 한 뒤 소설을 쓰는 분이었어요. 그 할아버지는 치매환자가 아니라 심한 당뇨로 실명 직전의 상황이었고, 신장 투석까지 해야 하는 불치환자였습니다. 그 분은 아무하고도 말씀을 안 하셨어요. 제가 습작시를 쓸 때였는데, 소설가인 그분에게 기운을 불어넣어주려고 제 시를 지어 읽어드렸어요. 시를 읽어드리던 일주일 내내 듣기만 하셨지 도통 말이 없으셨어요.

그러던 어느 날 ‘자네가 지은 시냐?’고 하시기에 ‘그렇다’고 했더니 은유가 더 들어가야 하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리곤 눈이 어두우니 돋보기를 들고 스케치북에 큼직한 글씨로 ‘내가 강원일보에 1966년 소설을 연재했었는데, 그 글을 오늘에 맞게 다시 쓰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신문사에 가서 필름으로 보관된 신문을 복사해 가져다 드리니 ‘이 장면을 이렇게 바꾸고, 이런 말을 추가해 달라’는 주문에 3개월간 밤샘을 하며 소설을 고쳐 10권을 인쇄해 드렸어요. 그러자 그 할아버지는 ‘이 책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자네 글공부하라고 시킨 거야.’라고 하시더라고요. 돌아가시기 전에 제 글쓰기 공부 스승이 된 잊지 못할 분이었지요.”

고 작가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동안 노인 100여 명 정도의 임종을 지켜드렸습니다. 자식 대신에 떠나시는 모습을 지켜드리면서 형언키 어려운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좋은 데 가시기를 빌어드리는 보람도 크지요.”
그는 끝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부모님을 요양원에 모신다고 죄책감을 갖지 말고 아침저녁에 인사를 드릴 수 있는 집 근처에 모시는 것이 좋습니다. 이 같은 자녀들의 문안인사를 받은 어르신들은 얼굴이 어둡지 않으시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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