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수필- 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추분은 우리에게
단순한 절기 이상의
커다란 가르침을 준다"

올해는 코로나19 감염병으로, 긴 장마로, 휘몰아친 태풍으로 우리 삶을 통째로 두들겨 부수는 너무 굵직굵직한 방망이에 휘둘려 어떻게 계절이 바뀌는지도 몰랐다. 오늘 아침 강원도 내륙에 서리가 관측됐다는 보도에 정수리를 내리치듯 정신이 번쩍 든다. 여름날 눅진눅진했던 이불을 내어 말리듯, 우울하고 무거운 일상에 눌린 삶을 거풍해서 신선하고 산뜻한 가을바람으로 환기하고 싶다. 아침 기온이 10도 가까이 떨어지며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재채기를 연발한다. 아직 9월인데 어쩐 일인가 싶어 달력을 보니 오늘이 ‘추분’이다.

추분은 지나침 모자람 그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중간지대의 덕이라는 뜻의 ‘중용’과 더불어 ‘균형’이라는 개념을 고대인들에게 촉발시킨 윤리적 상상력의 한자락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공화정이 선포된 1792년 9월22일 이날 역시도 추분이었다. 이날을 기점으로 공화력을 제정하면서 그들은 ‘프랑스 인민의 대표자들이 시민적·정신적 평등을 선포한 바로 그 순간 낮과 밤의 평등이 하늘에 새겨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상은 온통 코로나 확진자의 숫자에 몰입돼 있어도 계절은 흐르고 있다. 새벽공기 싸하니 목안이 따끔거리고 옷차림새도 달라졌다. 햇발도 한풀 숨이 꺾이고, 두어 자 더 깊어진 쪽빛 하늘엔 잠자리도 따라 높게 난다. 들판의 올벼는 벌써 누렇게 고개를 숙이고, 집 마당에는 보랏빛 방아와 구절초, 왕고들빼기 연노란빛, 청보랏빛 달개비, 분홍의 물봉숭아와 개여뀌 같은 들꽃이 스러지는 햇살 속에 애잔하다.

중지손가락 길이만한 초록오줌싸개 한 마리가 겁도 없이 날아와 배 컨테이너에 앉아 내 코앞에서 삼각형 얼굴을 또릿또릿하게 돌리며 나를 빤히 쳐다본다. ‘할 테면 해봐!’ 하는 도도한 표정이다. 나는 좀 밀리는 자세로 “제가 왜 날 저렇게 쳐다봐? 자기가 잘 생긴 줄 아나봐~” “갈색으로 바뀌지 않은 걸 보니 성충이 아니네~ 아직 젊어서 그런 게지” 남편은 “어릴 때 겁나는 게 있냐”며 웃는다.

지난주부터 배를 따기 시작했다. 집 뒤꼍에 밤이며 도토리가 떨어졌을 텐데 한 번 가보질 못한다. 다래나무 정원에 다래 하나 따지를 못한다. 작년부터 달리기 시작한 호두나무는 장마에 잎까지 모두 떨어지고 새순이 돋고 있다. 들깨꽃이 하얗게 피고 떨어지고 울타리콩 꼬투리가 여물어 간다. 이제 추분이 돼 밤의 길이가 길어지므로 벌레들이 동면에 들어가고 땅의 물기가 마르며 봄여름이 키운 곡식과 열매를 차근차근 거둬들이고 갈무리 하는 동절기로 돌아섰다.

릴케의 ‘가을날’의 기도처럼 /마지막 과실을 알차게 하시고/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그들을 완성시켜 무르익도록 재촉하시고/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소서/ 때를 맞춰 거두기를 함께 기도한다.

무르익는 가을 절기 가운데 오늘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추분이다. 독일의 루돌프 슈타이너 박사는 ‘식물의 생장에는 우주 전체가 관련돼 있다’면서 해와 달 천체의 리듬을 관찰하고 그게 자기 농장의 식물과 동물에 미치는 영향을 찾아내고 농사력을 만들었다.
이처럼 추분은 우리에게 단순한 절기 이상의 커다란 가르침을 준다. 풀 한 포기, 열매 한 알, 곡식 한 톨의 생명 속에도 해와 달이, 우주의 질서와 자연의 순리가 담겨 있다고. 사람 또한 그렇지 아니한가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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