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의 트로트 -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18> 고향 그리는 노래 (1)/<타향살이><꿈에 본 내 고향>

(1) 고복수의 <타향살이> 

▲ <타향사리>앨범 표지

1. 타향살이 몇해던가 /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나 십여년에 / 청춘만 늙어
2. 부평같은 내신세가 / 혼자도 기막혀서
    창문 열고 바라보니 / 하늘은 저쪽
3. 고향 앞에 버드나무 / 올봄도 푸르련만
    호들기를 꺾어불던 / 그때는 옛날
4. 타향이라 정이 들면 / 내 고향 되는 것을
    가도 그만 와도 그만 / 언제나 타향

                    (1934, 김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

 

▲ 울산 고복수 음악관에 있는 <타향살이>노래비

타향에서의 절망과 떠나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군더더기 없이 노랫말로 그려낸 잘 만들어진 노래다. 한 소절의 가사가 워낙 짧아 네 소절의 가사를 전체적인 한 통으로 묶어 따라가듯 불러야 제 맛이 난다.
고복수(高福壽, 1911~ 1972)는 울산 병영 출신이다. 소년기부터 다니던 교회의 외국 선교사에게 클라리넷과 드럼 등 악기를 배우며 가수가 되고픈 마음에 굶주려 있다가 결국 잡화상을 하던 아버지의 금고에서 당시 돈 60원을 몰래 꺼내 주머니에 넣고 무작정 상경한다. 모름지기 가수가 되려면 중앙무대인 서울로 가야 한다며… 그리고 콜럼비아레코드사의 콩쿠르에서 3등으로 입상하면서 가수의 길에 들어선다. 이때 그의 나이 스물 두살.

<타향살이> 한 곡으로 스타덤에 올라
그러나 선배들의 기세에 눌려 빛을 보지 못하고 있던 터에, 이를 눈여겨 본 작곡가 손목인의 권유에 따라 오케레코드사로 적을 옮기고, 데뷔곡으로 손목인의 곡 <타향>을 불러 그 한 곡으로 하루아침에 주목받는 스타가 된다. 히트 이후 곡제목을 <타향살이>로 바꿨는데, <사막의 한>이 함께 수록된 이 앨범은 발매된 지 한달 만에 무려 5만장이 팔려나가 밀리언셀러가 됐다.

당시 실향민 동포들이 많이 이주해 살던 만주 하얼빈, 북간도 용정 공연은, 고복수의 <타향살이>로 눈물바다를 이뤘다.
4절까지 돼 있는 노래를 가수와 관객이 하나가 돼 반복해서 몇 번씩 부르며 자리를 뜰 줄 몰랐다.

▲ 고복수-황금심 부부

그는 1941년 10살 연하의 여가수로 <알뜰한 당신>을 부른 황금심과 3년의 밀애 끝에 혼전임신으로 결혼해 ‘스타커플 1호’로 온 장안의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황금심은 고복수의 공연을 보고, 1950~60년대 미국의 인기 미남배우 게리 쿠퍼를 닮은 ‘하늘에서 내려온 분’이라고 생각하면서 연모의 정을 키웠었노라고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데뷔곡 <타향살이>의 히트 이후 <사막의 한>(김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 <짝사랑>(박영호 작사/ 손목인 작곡)이 연달아 히트가도를 달리며 당대 최고 인기스타로서의 반석은 더욱 굳건해졌다. 특히 <짝사랑>은 훗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십팔번으로 알려지면서 세상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고복수는, 가수 데뷔 23년 만인 1957년 8월 서울 시공관에서 은퇴공연을 갖는다. ‘팬이여 안녕! -고복수 마지막 무대’라며 신문광고면까지 장식했던 이 고별공연에는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 등 100여 명의 동료, 후배들이 우정출연해 그의 마지막 무대를 빛내줬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불운의 연속이었다.
손 대는 사업마다 실패를 거듭하며 생활고에 시달리다 1972년 식도암과 고혈압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의 나이 61세. 그가 세상을 떠나던 마지막 날엔 신성일, 이봉조, 신카나리아, 김세레나 등의 연예인들이 <타향살이>를 장송곡으로 부르며 그의 저승길을 눈물로 전송했다.

 

(2) 한정무의 <꿈에 본 내 고향>  

1.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
    저 하늘 저 산 아래 아득한 천리
    언제나 외로워라 타향에서 우는 몸
    꿈에 본 내 고향이 마냥 그리워
    (간주중 가수 독백~)
“뜬 구름아 물어보자. 어머님의 문안을/
 달님아 비춰다오,인성이와 정숙이의 얼굴을 /
 생시에 가지 못할 한많은 운명이라면/
 꿈에라도 보내다오,어머님 무릎 앞에/
 아아, 어느 때 바치려나 부모님께 내 효성을/
 꿈에 본 고향이 마냥 그리워~"

2. 고향을 떠나온지 몇몇해던가
   타관 땅 돌고돌아 헤매는 이 몸
   내 부모 내 형제를 그 언제나 만나리
   꿈에 본 내 고향이 차마 못잊어
 
                 (1951, 박두환 작사/ 김기태 작곡/ 이재호 편곡)

 

이 노래는 KBS<가요무대> 방송 35년 간의 방송횟수 집계순위 100위 곡에서 1위-<찔레꽃>(백난아), 2위-<울고 넘는 박달재>(박재홍)에 이어 3위를 차지해 그 인기도를 실감케 했다.
이 노래를 부른 한정무(韓正茂, ?~1960)는 얼굴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무명가수에 가깝다.

▲ 한정무

악극단 막간가수 통해 유행한 노래
함경북도 나진이 고향이라고 알려진 한정무는 무명가수로 잠시 활동하다 6.25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 내려와 국제시장에서 레코드 바늘을 파는 일을 했다. 이때 역시 평안도 실향민인 작곡가 한복남을 알게 돼 친구처럼 함께 지내게 된다. 그러다 추석날 밤 같이 바닷가 방파제를 거닐다가 누군가가 술에 취해 <꿈에 본 내 고향>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한복남이 한정무에게 제안했다.

”한형, 저 노래 레코드 판이 나오지 않은 것 같은데… 레코드판 냅시다!”
이렇게 해서 한복남이 운영하던 도미도레코드사에서 한정무가 취입을 하게 된다. 실상 그 이전에 이미 이 노래가 악극단 무대에서 막간가수들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고 있던 노래여서 대중들에게는 이미 귀에 익은 노래였다. 특히 송달협이라는 무대 막간가수가 부른 노래가 너무나도 절절해서 장안에 일대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럴 즈음에 실향민인 한정무의 노래가 앨범으로 나와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 한정무에게 <꿈에 본 내고향>을 취입시켜 앨범을 낸 한복남

한정무의 조금 투박하지만 꾸밈없는 목소리에 실향민으로서의 한이 서린 애절함이 흠씬 묻어나 장안의 인기몰이를 했다. 특히 가사 1절과 2절 사이 간주를 배경음악으로 깔고 가수가 직접 읊조리는 독백은, 가수 자신의 애끓는 넋두리 그대로여서 듣는 이의 감성을 한껏 자극했다.

이 곡의 히트 뒤 한정무는 6.25전쟁의 비극이 낳은 한 삽화같은 노래 <에레나가 된 순이>(1953, 손로원 작사/ 한복남 작곡)를 불러 적잖은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1960년 42세의 나이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이 세상을 떠나, 그의 목소리만 이 두 노래로 이 세상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

 

울산광역시 중구에 가면, 우리나라 제1세대 가수로 <타향살이>, <짝사랑>을 부른 고복수의 이름을 붙인 ‘청춘 고복수 길’이 있다. 고복수는 본래 울산시 병영동 출신이지만, 중구청이 ‘원도심 볼거리 확대와 골목상권 활성화’를 목적으로 2017년 도시재생 주민 아이디어 프로젝트의 하나로 고복수를 중구로 끌어들여 옛문화 거리를 조성하고, 고복수 음악관을 세웠다.

중구 시계탑 사거리를 중심으로 격동의 산업화 시대였던 1970~80년대를 돌아본다는 의미로 시계소리를 차용해 명명한 ‘똑딱길’이 끝나는 지점부터 ‘청춘 고복수 길’이 시작되고, 그 언저리에서 ‘고복수 음악관’(울산시 중구 성남동 81)을 만날 수 있다.

▲ 울산시 중구 성남동에 위치한 ‘고복수 음악관’

‘고복수 음악관’은 지난 2018년 12월24일 중구청이 울산 중구문화원 인근의 2층짜리 노후주택을 9억 원을 들여 매입, 리모델링 해 ‘고복수 음악살롱’으로 개관했다가 ‘고복수 음악관’으로 명칭을 바꿨다.

1층은 고복수-황금심 부부의 노래인생 역정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념관 성격의 전시관으로 꾸미고, 2층은 레트로(복고풍) 분위기의 카페다. 이곳 ‘고복수 음악관’과 ‘청춘 고복수 길’을 통해 잠시잠깐 동안이나마 근대세상으로의 시간여행을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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