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의 트로트 -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13> 황정자의 <처녀 뱃사공>

▲ 경남 함안 악양루에서 바라본 함안천과 남강이 합수하는 두물머리 풍경과 뚝방길의 해바라기. 노래의 배경이 된 곳이다.

남편과 두 아들 못잊은 채
눈 못감고 떠난 황정자씨
… 친지들 가족찾기운동 벌여

‘<오동동 타령>으로 유명한 왕년의 민요가수 황정자(黃貞子)씨가 지난 27일(1968년 2월27일) 0시, 41세의 짧은 인생을 살고 유명을 달리했는데, 끝내 잃어버린 남편과 두 아들을 찾지 못한 채 차마 눈을 감지 못했다.
해방 후 가요무대를 휩쓸던 황 씨는 김낙권씨와 열렬히 사랑한 끝에 결혼, 두 아들까지 낳았으나 10년 전(1958년) 어떤 이유에서인지 헤어졌다. 두 아들은 남편 김 씨가 데리고 갔다. 정신이상증세로 오래 고생한 원인도 남편과 아들을 잃은 때문이었다는데, 이제 황 씨를 보낸 친지나 친척들은 이땅 어디에선가 살고 있을 남편과 두 아들이 쓸쓸히 죽어가 묻힌 그녀의 무덤이나마 찾아주기를 바라면서 가족찾기운동을 벌이고 있다.
열살 때부터 민요를 부른 황 씨의 노래는 일제 때 나라를 잃고 망명한 우리 동포들의 눈물을 자아냈었다. 그녀는 48년(1948) 서울의 가요무대에 정식으로 데뷔한 이래 황금좌·조선·성보·KPK(케이 피 케이)·국도쇼 등 각 단체에 출연했고, <오동동 타령>을 비롯해 <살랑청풍> <비 오는 양산도> <신 이별가> <봄바람 임바람> <실버들 타령> <노들강변 6백년> 등의 히트송을 남겨 이화자·황금심과 더불어 ‘3대 민요가수’로 꼽혔었다. 그러나 10년 전 남편과 생이별 하면서부터 심한 정신적 타격으로 기억상실증이 일기 시작, 7년 전 의정부 어느 극장에서 쓰러진 이래 가요계를 떠났다.
점점 심해지는 정신이상증상으로 대전 모 정신요양원에 입원했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어느새 서울에 와서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는 그녀의 언니집에서 쓸쓸히 눈을 감은 것이다.
3월1일 장지로 떠나는 그녀의 마지막 길에도 남편 김낙권씨와 이제는 장성했을 두 아들의 모습은 없었다.’

 

▲ <처녀 뱃사공> 노래비

이상은 황정자의 안타까운 사망소식을 알린 당시 한 일간신문의 기사 전문이다. 한때 수많은 팬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녀가 흡사 무연고자처럼 쓸쓸하게 세상을 뜰 줄을 누가 알았으랴. 그녀는 1956년 <오동동 타령>으로 인기몰이를 시작, 2년 뒤인 32세 때 신민요풍의 <처녀 뱃사공>을 부르면서 가요계 최고 스타의 자리에 올랐다.

 

             <처녀 뱃사공>
1.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면

    군인간 오라버니 소식이 오네
    큰애기 사공이면 누가 뭐라나
    늙으신 부모님을 내가 모시고
    에헤야 데헤야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

2. 낙동강 강바람이 앙가슴을 헤치면
    고요한 처녀 가슴 물결이 이네
    오라비 제대하면 시집 보내마
    어머님 그 말씀에 수집어 질 때
    에헤야 데헤야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

3. 낙동강 강바람이 내 얼굴을 만지면
    공연히 내 얼굴은 붉어만져요
    열아홉 꽃과 같은 여학생들이
    웃으며 서양말로 소근거리면
    에헤야 데헤야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

                       (1958, 윤부길 작사/ 한복남 작곡)

 

이 노래의 노랫말을 쓴 윤부길(尹富吉, 1912~1957)은 충남 보령 출신으로 일본에서 성악공부를 하고 들어와 뮤지컬 배우, 극작가, 희극인 등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던 ‘만능엔터테이너’로, 당시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부길부길(富吉富吉)쇼’ 악극단을 이끌고 전국 순회공연을 다니고 있었다.(가수 윤항기·윤복희 남매의 아버지이기도 함)

▲ 케이 피 케이(KPK)악극단 시절의 윤부길(<처녀 뱃사공>노랫말 지은 이) 모습(사진 왼쪽으로부터 장세정·윤부길·신카나리아·김해송·이난영·이봉룡)

그날도 악극단을 이끌고 다음 공연지로 가기 위해 경남 함안의 악양지구 나루터에 도착해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뱃사공이 뜻밖에도 20대 처녀가 아닌가. 그 사연을 물으니, 자신들은 박말순-박정숙 자매로 오빠(박기준)가 난리통(1950년)에 군대에 입대해 늙으신 부모님을 대신해서 자신들이 교대로 뱃사공일을 하고 있노라고 얘기했다.

▲ <처녀 뱃사공>을 작곡한 한복남(<빈대떡 신사> 앨범 재킷)

윤부길은 숙소에 짐을 푸는 즉시 펜을 들어 그 사공자매의 얘기를 노랫말로 만들어 황정자에게 <오동동 타령>을 만들어 줬던 <빈대떡 신사> 가수겸 작곡자 한복남(韓福男, 1919~1991)에게 보냈다. <처녀 뱃사공>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 노래는, 그 어디에도 희망의 빛이 없었던 시절, 특히 여성들에게는 커다란 마음의 위안이 됐다. 가뜩이나 남존여비 사상이 고착화된 가부장제의 전통 인습에 묶여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던 당시의 여성들에게는 이 노래가 곧 동병상련의 이야기이기도 해 절대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 황정자 앨범

가창력 뛰어난 ‘천재소녀 가수’
황정자(1927~1968)는 서울(서대문구 냉천동)에서 태어났다. 말이 서울이지 집안이 워낙 가난해 학교 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8살 때부터 전국을 떠도는 유랑극단의 막간가수로 무대생활을 시작했다. 깜찍하고 또랑하면서도 힘 있고 유려한 가창력으로 이미 그때부터 ‘천재소녀 가수’라는 별명을 달고 다녔다. 무대에서는 꽹과리와 장구를 직접 치며 관객들의 흥을 돋우는 귀염둥이 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녀 나이 24살 나던 해인 1950년, 이난영 남편 김해송의 작·편곡인 <살랑춘풍>과 <약산 진달래>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가수의 길로 들어섰다. 학교는 다닌 적 없었으나 악보와 대본을 순식간에 암기하는 총명함에 주위사람들이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연이어 <오동동 타령> (1956), <처녀 뱃사공>(1958), <노래가락 차차차>(1963)가 히트하면서 신민요계 톱스타의 자리에 올라섰다.

구성지면서도 윤기가 흐르는 상큼발랄한 목소리가 경쾌한 곡의 리듬을 타면서 절로 듣는 이들의 흥을 부추겨 그야말로 선풍적 인기를 독차지 했다. 단단하면서도 찰기 있는 목소리에 가사 전달이 정확하고, 노래 맛과 흥을 살리는 추임새가 밴 간드러진 창법은, 단숨에 듣는 이들을 절로 노래에 빠지게 만들었다. <오동동 타령>과 우리의 경기민요 <노래가락>에 춤가락인 ‘차차차’를 덧붙인 신민요 <노래가락 차차차>가 그 대표적인 곡이다.

 

           <노래가락 차차차>
1. 노세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은 못노나니
    화무십일홍 이오 달도 차면 기우나니라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차차차)
    화란춘성 만화방창 아니놀지는 못하리라
    차차차(차차차)  차차차(차차차)

2. 가세가세 산천경개로 늙기나 전에 구경가세
    인생은 일장의 춘몽 둥글둥글 살아나 가자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차차차)
    춘풍화류 호시절에 아니놀지는 못하리라
    차차차(차차차) 차차차(차차차)

                         (1963, 김영일 작사 / 김성근 작곡)

 

노랫말 처럼이나 그런 호시절을 제대로 다 누리지 못하고 황정자는, 정신질환에 지병인 장암이 겹쳐 41세 불혹의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났다. 특히 끝내 그토록 오매불망 그리던 남편과 두 아들 등 가족의 얼굴을 보지 못해 눈도 감지 못하고 한스럽게 세상을 하직했다는 아픈 사연을 듣고 나니, 이 노래가 더욱 절절하게 가슴에 다가온다.

이 <처녀 뱃사공>은 1976년 ‘금과 은’(<내 나이가 어때서>를 부른 오승근과 임용재 남성듀엣)이 리메이크(Remake) 한 <옛노래 모음> 앨범에 수록해 다시 크게 히트하면서 ‘금과 은’은 <처녀 뱃사공>으로 MBC 10대 가수상과 KBS 최우수 남자가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 5월, 놀랍게도 KBS <가요무대> 35년 결산 최다 방송횟수 100선에서 현인의 <비내리는 고모령>에 이어 당당히 6위에 오른 것은, 이 노래의 식지않는 높은 인기를 새삼 확인시켜준 결과였다.

그녀가 한 많은 세상을 떠난지 오래지만, 악양나루 가까운 경남 함안군 대산면 서촌리 도로가에는 2000년에 함안군에서 세운 <처녀 뱃사공>노래비가 서 있고, 2007년부터 해마다 <처녀뱃사공 가요제>가 개최돼 그녀를 기리고 있다.
지금도 제목의 ‘촌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가 두루 불리고 있는 것은, 아직도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는 집안의 가장으로서 부양할 가족을 가녀린 두 어깨에 짊어지고 힘겹게 살아왔거나 살아가면서, 이 ‘팍팍한 세상·세월·세파의 강’을 건너가고 있는 ‘뱃사공’이 많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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