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명견 교수의 재미있고 유익한 옷 이야기(82)

"봄꽃들이 유난히
아름다울 수 있음은
긴 겨울 몹시 앓았기에..."

꽃의 대잔치다. 산수유, 민들레부터 시작된 꽃의 릴레이가 펼쳐지고 있다. 색깔도 모양도 모두 다르지만 한 마디로 ‘아름답다’는 점은 공통이다. 코로나19가 생명을 빼앗고, 인류를 두려움과 공포로 위협할수록 화려한 봄꽃들은 위로와 감동을 안겨줬다.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문화에는 유행이라는 것이 있어, 아무리 좋아하는 것들이라도 곧 흥미를 잃고 또 새로운 것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러나 ‘꽃’은 변함이 없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기쁨을 주며 사랑 받아왔다.

꽃은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인간들을 위해 특별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연인이 바치는 꽃은 사랑의 고백이 된다. 환경을 꾸미는 마술사이기도해서 플로리스트들을 존재케 하며 명성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 뿐인가 예술의 바탕이 돼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이런 꽃들이 코로나19로 인해 수난을 겪어야 했다. 추억의 벚꽃 길도 폐쇄됐고, 샛노란 유채꽃 밭과 각양각색의 튤립 수백만 본이 그 아름다움을 다 전하지도 못하고 무참히 갈아엎어지는 일도 겪었다. 졸업식과 입학식 등 각종 행사가 취소되면서 화훼농가들은 생존 앞에서 떨어야했다. 꽃 판매가 급격히 줄어 울고 있는 화훼농가를 돕기 위해 ‘꽃 사주기 운동’이 펼쳐지기도 했다. 꽃시장의 어려움을 함께 하는 국민의 마음까지 얹혀 또 다른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이 꽃들을 몸에 지니고 싶어 했다. 그러나 꽃이 그것까지는 허락지 않고 곧 시들어버렸다. 17세기 유럽 여인들이 작은 물병에 꽃을 꽂고 주머니에 넣고 다닌 것도 꽃의 아름다움을 몸에 지니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은 꽃을 꽃다발로, 화환으로, 손에 들기도, 목에 걸기도, 머리에 꽂기도 했지만 그 생명이 짧았다. 그러나 인류의 조상들은 꽃을 몸에 지니고 싶은 욕망을 버리지 못했다. 그리고 생각해낸 것이 그리는 것이었다. 벽에도, 가구에도 그리고 옷에도 그렸다. 그렇게 꽃무늬가 옷 위에 올라앉기 시작했다.

고대 중국은 수준 높은 문화를 만들어냈다. 실크를 짜고, 거기에 꽃들을 수놓아 꽃의 아름다움을 즐겼다. 직조술이 발달하면서 수를 놓는 대신 실크에 꽃무늬를 넣어 짜는 것이 가능해졌다.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시대의 유럽 귀족들이 금값과 맞바꾸는 이 같은 비단에 심취했다. 그 무렵 인도역시 높은 문화와 부를 누리고 있었고, 면직물이라는 보물이 그 풍요의 바탕이 되고 있었다. 면직물에는 꽃을 무늬로 찍어 부가가치를 높였다. 이것들이 또 다시 유럽인들을 열광케 했다. 그렇게 꽃은 꽃무늬가 돼 서서히 세계 사람들의 품에 살아남게 됐다.

유행이 아무리 변덕스럽다 해도 꽃무늬의 아름다움을 완전히 버리는 일은 없다. 꽃을 능가하는 아름다움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그 어원이 ‘앓다’에서 왔다는 주장이 있다. 모진 겨울을 이겨낸 봄꽃들이 유난히 아름다울 수 있음은 바로 긴 겨울 몹시 앓았기 때문이리라. 코로나19의 아픔을 앞서 이겨가는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의 ‘아름다운 꽃’으로 화려하게 피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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