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의 트로트 -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2> <해조곡><목포는 항구다>와 이난영

▲ 이난영이 어렸을 적 살던 집터 자리에 조성된 ‘이난영 여사 소공원’에 있는 ‘이난영 여사’ 상반신 조상.아래 받침대엔 <목포의 눈물> 가사 전문이 흰글씨로 새겨져 있다.(사진=박광희)

이천만 ‘겨레붙이’ 모두의 노래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은 단순히 목포사람들 만의 눈물과 설움이 아니요, 더 나아가 전라도 사람들만의 한풀이 탄식도 아니었다. 그것은 고은 시인의 말처럼 일제 식민치하에서 신음하고 있던 이천만 ‘겨레붙이 모두의 노래’였다.

이 노래가 조선반도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가자, 조선총독부에서는 노래 가사 중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이란 구절이 임진왜란 당시의 이순신 장군을 연상시킨다며 불온하다 해 발매금지 처분 직전까지 갔으나, 오케레코드사 이철 사장의 순간적인 기지로 ‘삼백년 원한 품은~’을 ‘삼백연에서 불어오는 편안한 바람’이란 뜻의 ‘삼백연 원안풍은~’으로 급히 개사해 위기를 넘겼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목포의 눈물>이 세상에 나올 무렵인 1935년대에 우리나라의 유성기 보급대수가 약 35만대에 달했고, 국내 굴지의 오케레코드사를 비롯해서 태평·콜럼비아·빅타·포리돌 등의 5개 레코드 회사에 전속돼 있던 이난영·백년설·남인수·고복수·장세정·김정구·현인·왕수복·이화자·황금심·백난아·박단마·이인권·박재홍 등 당대 내로라하는 가수들의 노래를 담아 찍어낸 SP(에스 피)판 음반 판매량이 물경 100만 장에 달했다고 하니, 가히 트로트 가요계의 황금기를 열었다고 할 수 있다.

SP는 ‘스탠다드 플레잉(Standard Playing)’이란 영문자의 머리글자로 엘피(LP-Long Playing,장시간 레코드) 레코드 판이 등장하기 이전시대의 음반이다. 녹음 저장공간이 적어 레코드판 한면에 1곡씩만 들어가는데, 유성기에 판을 올린 다음 몸통에 내장된 태엽을 감고 바늘을 그 판 위에 올려놓으면 음악이 나온다.
옛 어른들은, 이 SP판이 플라스틱이지만 딱딱해 바닥에 떨어뜨리면 깨졌기 때문에 ‘돌판’이라고 불렀다.

▲ 야외 위문공연에서 노래하는 신인가수 시절의 이난영.

<목포의 눈물>을 시작으로 이난영의 노래들은 라디오와 레코드판 가게에서 온종일 흘러나왔다. 뿐이랴. 조선 반도는 물론 저 만주벌판에 이르기까지 식민지 백성의 한과 서러움의 강물이 되어 흘렀다.

이러한 당시 대중음악계의 분위기 속에서 김해송·이난영 부부는 비록 남편 김해송의 쉼 없는 여성편력으로 ‘소양강 투신자살 미수사건’까지 벌어지는 해프닝까지 겪으며 허구한 날 속을 끓였으나, 음악활동에 있어서 만큼은 왕성하게 톱스타 커플의 면목을 유감없이 보여 줬다.

남편 김해송은 오케레코드사(훗날 콜럼비아ᆞ빅타레코드에서 활동)의 전속 지휘자 겸 작곡가ᆞ가수로 있으면서 부단히 곡을 쓰고 노래까지 부르면서 ‘재즈의 귀재’, ‘대중음악계의 천재’로 불리면서 바야흐로 전성기를 구가하기에 이르렀다.

▲ 이난영 남편인 작곡가 김해송.1950년 6.25 전쟁 때 납북돼 그 얼마 뒤 사망했다.

이 무렵 만든 곡이, 이난영에게 결혼기념으로 헌정한 <다방의 푸른 꿈>을 비롯해, 장세정이 불러 크게 히트한 <연락선은 떠난다>(1937)와 <울어라 은방울 >(1948), 박향림의 <오빠는 풍각쟁이>(1938), 이난영의 <울어라 문풍지>(1940), 이화자의 <화류춘몽>(1940), 그리고 고운봉의 대히트곡 <선창>(1941) 등이다.
다분히 도시적 인텔리 감각을 지니고 있었던 김해송의 곡들과, 이난영의 낭랑한 노래들은 조선인들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도 즐겨부르는 대중가요가 됐다.

           <해조곡>

1. 갈매기 바다 위에 울지 말아요
   물항라 저고리에 눈물 젖는데
   저멀리 수평선에 조각배 하나
   오늘도 아아아아 가신 님은 아니오시네 

2. 쌍고동 목이 메게 울지 말아요
   굽도리 선창가에 안개 젖는데
   저멀리 가물가물 등대불 하나
   오늘도 아아아아 동백꽃만 물에 떠가네

3.  바람아 갈바람아 불지 말아요
   얼룩진 낭자 마음 애만 타는데
   저멀리 사공님에 뱃노래 소리
   오늘도 아아아아 우리 님은 안오시려나

                              (1937,  이노홍 작사 / 손목인 작곡)

무렵의 이난영은 노래에 관한한 순풍에 돛단 듯이 정상가도에서 순항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것은 뭐니해도 만능 엔터테이너였던 남편 김해송의 음악적 뒷바라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요새 사람들은, 이난영을 단순히 <목포의 눈물>을 특유의 콧소리와 꺾기창법으로 처량하게 노래한 일제 식민지시대의 가수로만 기억하지만, 천만에다. 그녀는 다재다능하고 재기 발랄한 ‘똑똑한 예능인’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신민요와 만요는 물론, 재즈풍과 블루스풍의 곡들까지 폭넓게 소화해 내며, 뮤지컬 주연배우로서의 기량도 숨김없이 발휘했다.

▲ 62년 전인 1958년, 서울 을지로4가에 있던 국도극장에서 공연을 마치고 영화배우들과 이난영 극단 단원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앞줄에 앉은 여성-왼쪽이 배우 김지미, 오른쪽이 이난영. 뒷줄 왼쪽부터 계수남·남인수·이민(영화배우)·고운봉·김선영.

1945년 8.15 광복 후에 남편 김해송이 KPK(케이 피 케이) 악극단을 만들어 미군부대 클럽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전국 순회공연을 다닐 때에도, 김해송이 오페라 형식의 뮤지컬 <투란도트>(1948), <카르멘 환상곡>(1949), <로미오와 줄리엣>(1950)을 무대에 올릴 때에도 주인공은 당연히 이난영이었고, 그 배역들을 훌륭하게 소화해 내며 관중들의 갈채를 받았다. 이가 시리도록 온몸이 저며오던 어린 시절의 가난은 옛이야기가 됐다.

어쩌면 그녀는 ‘극장 막간가수 이옥례’ 시절부터 아슴아슴 꾸어왔던 무대예술가나 배우의 꿈을 가지고 유감없이 그 ‘끼’를 발산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1935년 당시 조선 내 최대 발행부수를 발행하던 대중교양잡지 《삼천리》(시인인 파인 김동환 발행)에서 레코드 가수 인기투표를 실시했는데, 1위 왕수복(월북), 2위 선우일선, 그리고 3위가 <목포의 눈물>로 세상에 뜨기 직전의 이난영 이었다. 이중 왕수복ᆞ선우일선은 기생출신이고, 순수 대중가요 가수로서는 이난영 뿐이었다.
그러한 능력은 단순한 ‘끼’를 넘어선 철저한 자기관리와 치열한 연습에서 얻어진 것이었다. 그것만이 자신이 살 길 이었으므로.

<목포의 눈물>과 <해조곡>을 그녀에게 부르게 한 작곡가 손목인은, “리듬감각이 탁월하다. 음악을 정식으로 공부한 적이 없는데도 피아노로 노래 곡조를 한 두번 들려주면 정확하게 음정을 잡고 따라해 놀라웠다”며 데뷔 당시의 이난영을 회고하기도 했다.

▲ 이난영의 친오빠 이봉룡이 작곡한 곡들의 경음악 앨범.

모든 꿈을 앗아간…아, 전쟁!
그런 이난영 곁에는 남편 김해송과 일곱 남매의 아이들 외에, 고향 목포에서 질긴 가난의 굴레 속에서 솜공장이며 극장 영사기사로 전전하며 희망없이 고생을 밥 먹듯 하던 오빠 이봉룡이 있었다. 그에게도 누이동생처럼 타고난 음악적인 잠재적 재능이 있었던지, 매제인 김해송의 지도 등에 힘입어 작곡가 겸 가수의 반열에 올랐다. 남인수의 <낙화유수>(1942), 최병호의 <아주까리 등불>(1941), 백년설의 <고향설>(1942) 같은 노래들이 그가 작곡해 히트시킨 노래들이다.
그런 중에 여동생 이난영에게도 고향의 노래를 작곡해 주어 부르게 하면서 향수를 달래기도 했다. 기적이 울고, 갈매기 울고, 똑딱선도 울고, 동백꽃 끌어안고 내가 울던 내 고향 목포…

      <목포는 항구다>

1. 영산강 안개 속에 기적이 울고
   삼학도 등대 아래 갈매기 우는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똑딱선 운다

… (간주곡 멜로디로 <목포의 눈물> 삽입)

2. 유달산 잔디 위에 놀던 옛날도
   동백꽃 끌어안고 울던 옛날도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추억의 고향

3. 여수로 떠나갈까 제주로 갈까
   비 젖은 선창머리 돛대를 달고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이별의 고향

                 (1942, 조명암 작사 / 이봉룡 작곡)

그러나, 이난영·김해송 부부와 일곱남매의 아이들, 이난영·이봉룡 남매가 탄탄하게 펼쳐나가던 꿈같은 삶은 여기까지였다.
1950년 6월의 날벼락 같았던 전쟁은 모든 것을 한순간에 날려버렸다.

< 다음호에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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