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의 트로트-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 이난영과 유달산 중턱에 있는 <목포의 눈물> 노래비. 이난영은 공연 때 한복을 즐겨 입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 노래비’인 <목포의 눈물> 노래비는 1969년 목포에서 악기점을 운영하던 한 목포시민의 출연금으로 세워져 그 의미를 더해주고 있다.(사진/박광희)

 <1>‘목포의 눈물’ 이난영

○ … ‘오래된 노래’라고 여겼던 ‘트로트’가 부활했다. 요즘 애․어른 할 것 없이 그 트로트 열풍에 푹 빠져 온 나라 안이 시끌시끌 하다. 한때는 ‘먹물들’로 불린 식자층(識者層)의 많은 이들이 ‘3류’, ‘허접하다’며 ‘뽕짝’이라 치부했던 트로트.
뻔하디 뻔한 사랑타령인데, 청승맞은 눈물얘기, 이별얘기 인데…
그럼에도 왜들 그렇게 좋아라 난리들인 것일까. -우선 쉽다. 노래의 서사적 스토리가 낯설지 않은 나의, 우리 모두의 얘기다. 그래서 들으면 편하고, 따라 부르기도 쉽다. 조금 더 무거운 의미를 부여하자면, 우리들 가슴속 저 밑바닥에 웅크려 잠자고 있던 짠한, 그래서 눈물도 찍어내게 하는 ‘한(恨)’의 정서 같은 것을 다시금 일깨우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의 대중가요 100여년 역사 속에서 1960년대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 1980년대 ‘가왕(歌王)’ 조용필이 있었다면,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의 ‘가왕’은 누가 뭐래도 이난영(李蘭影, 1916~1965) 이다.
그 냉혹했던 시절, <목포의 눈물>이란 곡으로 ‘가왕’에 올라 49년이라는 길지않은 생애동안 ‘불멸의 가인(歌人)’으로 불린 이난영의 자취를 찾아 목포로 간다. 이 땅에서 트로트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노래의 고향’이다. … ○

 

목포하면 먼저 목포의 눈물, 목포는 항구, 삼학도·유달산, 호남선 완행열차 등의 수식어가 떠오른다.
목포의 시인 문병란 (文炳蘭, 1935~ 2015)은 시 <목포>에서 ‘더 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 와서 / 동백꽃처럼 타오르다 / 슬프게 시들어 버리는 곳/ 항상 술이 마시고 싶은 곳이다’고 그렸다.
영산강 들녘을 가로지르며 허위허위 달려온 호남선 열차가 긴 숨을 토해내는 곳. 노령산맥의 마지막 봉우리인 해발 228m의 유달산을 등지고 서남해에 사금파리처럼 흩뿌려진 섬들을 품어 안으며 목포는 마치 커다란 모선(母船)과 같이 떠 있다.
이난영은, 그가 세상을 뜬지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이곳 목포-유달산·삼학도·난영공원에서는 때마침 흩날리는 봄 벚꽃잎 속에서 여전히 처연한 노랫소리로 살아 남아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었다.

이난영은 일제강점기인 1916년(6월6일), 이곳 목포시 양동 42번지에서 태어났다. 대물림같은 지독한 가난 탓에 부모님과 오빠(이봉룡) 등 온가족 모두가 고달픈 삶의 연속이었다. 일제의 식민지 공출 전초기지였던 목포항의 일용직 부두노동자로 매일 술에 절어 주사를 일삼던 아버지와, 남의 집 살이로 집을 떠나 있던 어머니, 목화솜 공장에 다니던 오빠…… 그런 암울한 집안 형편 탓에 엄마를 따라 집을 떠나는 바람에 배움의 길도 막혀, 목포여자공립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 4학년 중퇴가 학력의 전부다. 열다섯 살 무렵까지는 아무런 희망도 없이 남의 집 살이(식모살이라 함)를 하는 엄마 곁에서 군일을 거드는 게 매일매일의 일과였다. 오로지 ‘밥’을 위해.

<목포의 눈물>로 가요계 스타로 급부상
그러던 와중에 맨손 뿐인 그녀의 인생에 일대 희망의 전기가 마련되는 기회를 잡게 된다. 엄마가 목포를 떠나 제주도에서 극장(제주 최초의 극장이었던 ‘창심관’)을 경영하는 일본인집 가정부로 들어갔는데, 그 엄마를 찾아 제주행을 감행한 것.
그곳에서도 더부살이로 있으면서, 간혹은 해녀 물질도 하면서 주로 주인집 어린아이를 돌보게 됐다.
그러던 어느 하루,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이를 등에 업고 서성대면서 입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는데, 어느 결엔가 그 노랫소리를 들은 일본인 극장 사장이 그녀를 불러세우고 정색을 하며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극장 무대의 막간 가수(극단 공연이나 영화 상영 사이사이 쉬는 시간에 무대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로 노래를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것이 인연이 돼 ‘얼굴 없는 열여섯 살 극장 막간 가수 이옥례’는, 당시 유명했던 태양극단의 제주도 순회공연 때 노래실력을 인정받아 픽업됐고, 이 극단의 일본순회공연에도 단원으로 합류해 유감없이 노래를 불렀다. 데뷔곡 <불사조>와 <시드는 청춘> <지나간 옛꿈>이 이때 나왔다. 그리고 열일곱 살 나던 해인 1933년, 국내 굴지의 오케 레코드사 이철(李哲)사장에게 발탁돼 <향수>란 곡을 취입해 내놓으면서 본격적인 가수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조금은 촌스러운 ‘옥례’라는 이름을 ‘난영’이라는 예명으로 바꾼 것도 이 무렵이다.

그렇게 가요계 신인가수로 발탁된 지 3년만인 19세 때, 그녀에게 단숨에 스타덤에 오르게 되는 일생일대의 행운의 찬스가 찾아온다. 그러니까 1935년, 조선일보가 일제 치하에서 국민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조선 10대 도시 찬가-향토 신민요 노랫말 공모’를 실시했는데, 이 공모에서 문일석(文一石; 본명 윤재희)이라는 목포출신 무명시인의 <목포의 사랑>이란 시가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그때 마침 <타향살이>를 부른 가수 고복수에게 주려고 손목인 작곡가가 만들어 놓았던 <갈매기 우는 항구>라는 곡의 멜로디에 당선작 <목포의 사랑> 시를 가사로 얹고, 본래의 시 제목인<목포의 사랑>을 <목포의 눈물>로 타이틀을 바꾼 다음, 목포 출신 신인가수인 이난영에게 부르게 했다는 게 작곡가 손목인의 생전 회고다.

▲ <목포의 눈물>이 수록된 《이난영 추억의 노래》 앨범 자켓.

<목포의 눈물>이 시중에 나오자 마자 반응은 뜨거웠다. 순식간에 5만 장의 레코드 판매고를 올리며 이난영은 가요계의 ‘새 별’로 급부상 했다.

1.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씨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2.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3. 깊은 밤 쪼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상처가 새로워진는가
    못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어느 시인은 “마치 꽁꽁 앓는 듯한 콧소리 섞인 이난영 특유의 청아한 목소리에다 흐느끼듯 애잔하게 애간장을 토막토막 끊어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난영의 목 꺾기창법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고 평했다.
시인 고은(高銀, 1933~ )은 그의 연작시 <만인보(萬人譜)>에서 <이난영>을 “긴 목 가는 허리 /…
(중략)… / ‘목포의 눈물’은 겨레붙이 모두의 노래였다 //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 임진왜란은 아직도 한으로 애끓이며 살아 있었다.”고 묘사했다.

‘세기의 결혼’과 함께 시작된 불행
그럴 즈음, 그야말로 한참 뜨기 시작할 때, 이난영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 당시 평양 숭실전문 출신의 ‘천재적’ 작곡가 이자 지휘자·가수인 김해송(金海松, 1911~?)과 은밀히 급속도로 가까워져 덜컥 혼전 임신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하게 됐다. 1936년의 일로 그녀의 나이 20세 때였다. 모르긴 해도 이난영은 김해송의 인물도 인물이지만, 출중한 음악적 재능에 더욱 매료돼 거침없이 김해송에게 빠져들지 않았나 싶다. 당시 신문은 두 사람의 결혼식 소식을 세세하게 보도하기도 했다.

-‘김해송-이난영 결혼. 오케 회사의 인기가수로 그 천부의 목소리를 엘보나이트를 통하야 만천하에 자랑하던 양 가수는 그간 오랫동안의 연애의 시기를 지나 지난 12월24일 오후4시 경성 (요리집)식도원(食道園)에서 (연극인)이기세씨의 주례로 결혼식이 거행 되었다. 오케 악사 일대의 결혼행진곡 이며 연회시의 그들의 쟈스(재즈)뺀드 연주, 신랑의 독창 등 참으로 유쾌하였다.’
본명이 김송규(金松奎)인 김해송은 재즈의 귀재로도 그 성가를 높였을 뿐 아니라, 일본 엔카 리듬에 민요를 결합한 트로트곡을 작곡하기도 했으며, 독학으로 배운 기타 연주의 달인으로도 첫손에 꼽혔다.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 (1961)란 노래 작곡자로 김해송의 제자격인 손석우(孫夕友, 1920~2019)는, ‘전문적인 기타연주가가 꿈’이라며 손목인을 찾아가 오케레코드사의 전속 연주자로 발탁돼 조선악극단을 지휘하던 김해송의 기타 연주 모습을 보고 “그에게서 광채가 느껴졌다!”고 생전에 회고하기도 했다.

결혼 3년 후인 1939년, 이난영의 생일 축하선물로 <다방의 푸른 꿈>이라는 재즈풍의 블루스곡을 작곡해 부르게 하면서 부부간의 변함없는 애틋한 사랑을 과시하는 듯도 싶었지만, 김해송의 불같은 ‘바람기’는 쉬 수그러들지 않았다.
심지어는 이난영이 집에 있는데도 버젓이 여자를 끌고 들어와 잠을 자거나, 툭하면 손찌검을 해대 ‘조선 최고의 슈퍼스타’ 이난영은, 연년생으로 줄줄이 태어난 일곱남매를 부둥켜 안고 눈물바람으로 지새는 날이 허다했다.   

< 다음호에 계속 이어짐>

Tip. ‘트로트’란?
트로트(trot)는, 영어로 말이 총총걸음으로 빠르게 걷는 ‘속보’에서 따온 말이다. 이것이 대중 음악의 한 장르로 쓰이게 된 것은 20세기 초. 당시 미국에서 남녀 한 쌍이 추는 4분의 4박자 리듬의 사교춤이 유행했는데, 이 사교댄스의 리듬인 폭스-트로트(fox-trot)에서 따왔다. 그리고 이 리듬형식은 당시 유행을 타고 일본 고유 민속음악에 접목돼 ‘엔카’의 형식이 됐고, 우리나라의 대중가요가 이 영향을 받았다. 그런 까닭에 우리의 트로트를 놓고 ‘왜색’ 시비가 일었고,‘뽕짝’이라는 비하적 명칭도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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