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수필-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한겨울의 추위보다
요즘 같은 환절기에
사람이든 나무든
병들기 십상이다..."

며칠 전부터 피기 시작하는 자두꽃이 된서리를 맞아 열매 없는 빈나무가 될까 노심초사 했는 터라, 눈을 뜨자마자 커튼을 제치니 하얀 성에가 창에 가득 서린 것이 아직도 새벽녘의 쌀쌀함은 날카롭기가 그지없다. 커튼 사이로 검푸른 빛이 돌던 창문이 점점 희어지더니 아침 햇살에 치잣빛으로 물이 든다. 세계는 온통 코로나19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데 서리를 탓할까마는, 왜 한낮의 햇발은 두터워져서 봄꽃을 펑펑 피워내고, 새벽 찬서리는 농부의 시름 어린 새벽잠을 깨우는지. 항상 일정한 체온을 유지하려는 몸은 단 1℃의 작은 기온변화에도 혼란스러운데 한겨울의 추위보다 요즘같이 일교차가 10℃ 이상 벌어지는 환절기일수록 사람이든 나무든 병들기 십상이다.

하 수상한 세월 속에서도 꽃 먼저 피는 봄은 그 순서가 있다. 먼저 핀 매화는 그 발아래 하얗게 떨어져 바람에 날리고, 개나리, 진달래에 엊그제부턴 자두나무 두 그루가 마주 서서 하늘을 가리고 뽀얀 꽃터널을 만들더니 연달아 벚꽃이 피고 농원에 배꽃마저 피고 있다. 아랫집 나무울타리엔 명자꽃이 유난히 붉고, 땅바닥에 붙은 종지나물은 제비꽃보다 더 예쁜 연보랏색으로 길을 따라가며 넘실거린다. 겨우내 꼼짝없이 박혀있던 몸이 봄빛에 이끌려나오고 꽃향기에 취해 시름을 잊는다.

과거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자연을 깊이 있게 바라보며 삶의 진리를 찾으려 했다고 한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자연 속에서 서로 깊이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연에 늘 귀 기울여 모든 것의 이름을 지었다는데, 인디언의 세계는 그런 이름으로 가득하다. 그들은 특별한 상상력을 동원해 달(月) 이름을 정했는데, 4월을 ‘생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 달’이라 짓고 기뻐했다고 한다.

코로나19가 좀체 사그라들지 않는 상황에 우리 곁에 성큼 다가온 봄. 긴 한숨으로 맞지 말고 저들처럼 우리 생에 기쁨을 주는 봄으로 맞이해 봄이 어떨지. 비록 바이러스 방역차단을 위해 문을 닫아걸었지만 인간관계는 오히려 더욱 절실해졌고, 그것이 인간 배척이나 혐오로 나간다면 인류의 미래는 더 불행해질 것이다. 세계는 지구촌이라는 이름으로 하나 됐고 인디언의 말처럼 우주에 있는 생명체가 모두 자연으로 서로 묶여져 있다면 우리를 이루고 있는 이웃과 자연을 사랑하는 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일 것이다.

고등학교 가사시간에 뜨개질을 배울 때 나는 참을성이 없어 끝까지 완성해내질 못했다. 그런데 ‘이 조끼를 떠서 누구에게 선물해야지’ 하고 맘을 먹으면 지루함을 이기고 누구보다 빨리 끝내는 자신을 발견했다. 쿠션 커버나 덧버선이나 내가 쓰려고 짜기 보다는 누군가에게 주려고 열심히 짰던 기억이 있다. 그것은 노동이 아니라 즐거움이었다. 지금도 나는 가끔 그런 기쁨을 맛본다. 예를 들면, 봄나물을 뜯어 장아찌 담가 좋아하는 친구와 나누는 일이다. 어제는 작년에 쓰고 남은 생강청과 편강을 갈아 넣고 생강고추장을 담갔다. 양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추위를 많이 타고 손발이 차서 늘 병치레를 하는 친구가 몇 있다. 그들을 생각하며 담그는 고추장은 쉽게 잘 담가진다. 도시에서 맛보기 어려운 제철의 식품을 잘 나누는 것이 시골에 살면서 십 수 년이 지나도 우리의 관계를 이어가는 비법이 아닐까 싶다.

나는 오늘도 봄볕을 따라 언덕을 오른다. 불어오는 봄바람에 아직 코끝이 차갑고, 흙모래가 입안에 버적거려도,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사람을 쬐러나간다. 마음에 곰팡이가 피기 전에 나물도 뜯고 전화도 하면서 홀로 또 함께 봄나들이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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