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 이우영 초대 중소기업청장

한국은행 부총재와 중소기업은행장을 거쳐 초대 중소기업청장을 지낸 이우영 전 청장은 자신이 살아온 지난 나날을 책으로 펴냈다. 이 전 청장의 85년 인생 회고록인 ‘꿈을 이루기 위해 살아온 흙수저 인생’에는 그가 공들여 살아온 열정과 내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전 청장으로부터 값진 인생역정을 들어봤다.

1차 오일쇼크 때 국가부도 막은 주역
고객감동․주주이익 극대화에 최선
38년 공직생활 중기청장으로 마감

쌀 한말 들고 대구로 홀홀 유학
이우영 전 청장은 1936년 경북 상주의 빈농에서 태어났다. 그의 초·중·고교 시절은 6·25전쟁만큼 치열하고 비참했다. 어려운 가정형편에 대구로 나와 고교에 진학한다는 것은 당치도 않는 일이었다.
그는 부모의 승낙도 없이 고등학교에 입학원서를 내기 위해 살을 에는 추운 날, 쌀 한 말을 들고 연고라곤 전혀 없는 대구로 올라갔다. 머물 집이 없어 이곳저곳을 헤매다가 다행히 초교 은사의 도움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해 가정교사를 하며 학교를 다녔다.
“처절했던 고교시절의 생활은 차마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는 고려대 상학과를 졸업하고 만 23세 약관의 나이에 한국은행 행원으로 금융인의 길에 들어섰다. 사우디아라비아 초대 재무관, 한국은행 자금부장과 이사를 거쳐 은행감독원 부원장과 한국은행 부총재에 이르기까지의 30년은 열정이 점철된 보람찬 생활이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이 전 청장은 1973년 1차 오일쇼크 당시 외환자금과장이었다. 당시 석유가 배럴당 3불이던 것이 4배 가까운 11불로 급등했다. 한국은행 외환보유고는 6억 불로, 석유 20일분 구입분에 불과해 국가부도 직전이었다. 이때 그는 세계 20개국에 나가있던 한국계 은행으로부터 빚을 얻어 국가부도의 위기를 극복했다. 그는 이 일이 평생 가장 큰 보람이었다고 말했다.
이 전 청장은 1993년 4월1일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중소기업은행장으로 발탁됐다. 한국은행에 들어간 지 34년 만에 은행장에 오른 것이다.

금융거래 투명화로 중소기업 지원
이 청장은 중소기업행장이란 중책을 맡고는 원활한 자금지원을 첫 번째 목표로 했다. 은행은 자금 공급규모가 항상 적기 때문에 당시엔 자금대출을 미끼로 한 은행직원들의 뒷돈 거래가 횡횡했던 시절이다. 이 청장은 금융거래의 공개와 투명화로 담보능력이 작은 중소기업을 돕겠다는 취지로 국내 최초로 신용대출 평가 모형을 개발해 신용 위주의 원활한 자금지원의 물꼬를 텄다.

한편, 이 청장은 행원들에게 “대출은 은행이라는 기업이 은행제품을 파는 것과 같다. 기업은행에서 대출을 받는 고객은 고마운 분이니 고객을 고자세로 대하지 말고 잘 모셔라.”라며 고객만족경영을 최우선으로 했다.
그는 은행의 주인인 주주들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수익극대화 경영에 주력했다. 그 일환으로 기업은행카드 월 100만 원 사용고객은 지점장이, 1000만 원 사용고객은 청장이 직접 전화해 감사 인사를 하고, 명절에는 선물을 보내는 등 고객감동 경영에 힘써 수익을 늘렸다.

청탁 거절 투명인사로 ‘애국자’ 별명
이 전 청장은 은행원이 보람차게 일할 수 있도록 공정하고 투명한 인사에도 주력했는데, 부장급 이하 인사는 부행장에 전부 맡기고 자신은 임원 인사만을 했다.
이 청장은 공정·투명 인사를 관철하고 청탁거절을 위한 각오로 사직서를 늘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재무장관, 청와대 경제수석, 안기부 차장을 만나 청탁거절을 다짐받고 인사를 단행하는 배포를 발휘했다.
한편, 이 전 청장은 1994년 정부가 장애인의 해로 지정하는 것을 기회로 해 한국전쟁 시 불발탄을 갖고 놀다가 한쪽 손을 잃은 상고 출신의 영업부장을 임원으로 등용하는 용단을 내려 행원들로부터 ‘애국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는 은행 운영경비 중 인건비 비중이 60%임을 감안해 직원감축에도 주력했는데, 연말에 직원들의 정년퇴직에 대비해 신규직원 임명을 최소화해 1만2천 명의 직원을 1만 명으로 감원해 냈다.
공기업으로서 사회공헌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그는 1993년 6월5일 세계환경의 날을 맞아 기업은행의 공익상품인 녹색환경신탁통장을 출시했다. 그는 이 상품이 출시되자마자 청와대를 방문해 김영삼 대통령에게 가입을 권유해 청약을 받아냈고, 이후 국회의장, 대법원장, 서울시장, 국무총리 등 여러 부처 장관과 기관장들에게도 가입을 받았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751억 원을 끌어 모은 그는 31억 원을 환경부장관에게 녹색기금으로 전달했다고 한다.

신규 수익원 창출과 인원 감축으로
은행장 재직 중 순수익 3배 올려

이우영 전 청장은 이 같은 과제를 차근차근 잘 추진해냈다. 그 결과, 1993년 은행장으로 취임해 1996년 임기를 마칠 때까지 기업은행의 총자산과 대출금을 100% 신장시키고, 예금은 50% 이상, 신용카드 매출과 각종 수수료 수입은 300%나 높여 놓았다. 특히 경영합리화 노력을 통한 인원 감축과 신규 수익원 창출을 통해 당기순수익은 3배나 끌어올렸다.
“이 같은 성과는 1만여 임직원 모두가 합심해 거둔 것입니다. 특히 공정인사를 한 결과, 직원들이 신바람 나게 더 열심히 일한 덕분이죠.”

1994년 2월초 이 전 청장은 금융연수원장에게서 대통령이 직접 통화하고 싶다는 전갈을 받았다. 대통령과의 직접 통화에서 그는 중소기업청장 임명통보를 받았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 전 청장과의 전화통화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중소기업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래서 청장을 제대로 뽑아야겠다는 생각에 적임자를 찾는데 엄청나게 애를 먹었습니다.”

그 말은 들은 이 전 청장은 정말 열심히 일했다고 한다. 특히 중소기업청장은 차관급임에도 장관들이 참석하는 국무회의에 참석하는 막중한 책임감으로 열심히 일했다고 강조했다.
“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중소기업청이 개청하는 만큼 할 일이 산더미 같이 많았습니다. 중기청 주요사업 수립과 7개 지방사무소를 합쳐 각 지방중소기업청 11개를 만드는 일, 직원 배치, 개소식 참석 등 무척 바빴죠. 10개월간 개청 준비를 마치고 짧고도 긴 38년의 공직생활을 잘 마칠 수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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