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귀농아지매 장정해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마당을 가로지른 회양목엔
벌들이 붕붕거리고
매화꽃이 열리기 시작한다"

창밖으로, 봄볕이 더해가는 강 건너 길에 드문드문 공사장 트럭만 지나가고, 익숙한 분주함이 사라진 거리엔 한숨만 나뒹굴어 사방 천지가 낯설게 고요하다. 갑자기 찾아온 코로나가 우리 일상 모두를 얼어붙게 만들고, 한 20년 전 쯤의 을씨년스런 옛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강풍이 분다는 기상특보가 이미 지나갔는데도 창밖의 매화나무 가지가 몸서리를 치듯 마구 흔들린다. 그럼에도 3월의 하루가 그리 한가한가. 하루쯤은 참아 볼만도 하지만 우수, 경칩, 춘분 세 절기를 지나 벌써 봄은 들어오고 있는데 과수농가는 그리 쉽지가 않다.

무겁게 늘어진 마음을 핑계로 미뤄온 일들을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 아직도 해 뜨기 전 창고 지붕 위로, 배나무 가지 위로, 풀섶 위로 내린 서리가 은빛으로 반짝이고, 개집 물통에 살얼음이 얼어도 더 이상 봄을 밀어낼 수가 없다. 불어오는 바람 앞에 사람마다 생각이 다 다른 것이 아니겠는가. 숨든, 엎드리든, 마주 부딪치든 각자도생(各自圖生)해야 하는 것이 인생의 답 일런지.
햇살이 퍼진 한낮에 이제 나는 마음의 빗장을 풀고 봄 마중을 나간다. 기다리는 것은 더디 왔고, 더디 오더니 쉽게 흔적도 없이 가버릴 아까운 봄을 이대로 놓칠 수는 없다. 마당으로 한걸음 내딛고 보니 훅 들이치는 꽃내음에 코가 문드러지고, 반벙어리 말더듬듯 겨우내 입안에서 우물거리던 말 한마디 튀어나온다. “살았구나.”

마당을 가로지른 회양목엔 벌들이 붕붕거리고 매화꽃이 열리기 시작한다. 집 뒤안길 산에서 흘러내리는 골짝을 따라 애기 손바닥 만한 머윗잎이 소살소살 돋았다. 강풍에 꺾여 떨어진 왕버드나무 가지에도 올리브색으로 꽃이 폈다.
나는 냉큼 바구니 들고 산 아래 텃밭을 오른다. 묵은 밭고랑으로 냉이는 지천으로 깔려 있고 쑥은 아직 어리다. 둑으로 둑으로 이어진 비탈마다 노오랗게 물이 오르기 시작한 개나리가 바람에 쓸려 여기저기 부러져 널려 있다. 양지바른 둑으로 어린 쑥을 찾아 헤맨다. 해마다 쑥이 많은 자린데도 역시 너무 어리다. 아쉬운 마음에 내려가야지 하고 돌아서는데, 실뭉치 같은 색다른 것이 눈에 꽂혔다. 달래였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와우!’ 고함치며 진주알 같은 달래뿌리를 다치지 않게 캐느라고 밭두렁에 아예 퍼져 앉는다. 등 뒤로 봄볕이 따끈하고 불어오는 바람도 귀찮지만은 않다.

서너 뭉치 달래를 힘을 다해 캐다보니 벌써 해거름이다. 봄으로 가득 찬 바구니를 안고 마당 수돗가에서 머위, 냉이, 달래에 붙어온 흙덩이를 씻어낸다. 머위는 장아찌로 담고, 냉이와 달래는 그대로 사돈댁에, 딸집에, 고추장과 함께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친구집에 조금씩 나눠 부쳐야겠다. 뭔가 작은 것이라도 소통할 것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 그리고 인생 제2막을 시골로 내려와 산 것이 얼마나 잘한 일인가도 싶다. 언젠가 목사님 말씀이 생각난다. 달리기를 제일 잘한 사람부터 차례로 줄서서 가다가 갑자기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뒤로 돌아 가” 호령이 떨어지면 맨 꼴찌가 맨 앞이 되는 게 인생이라던.

봄나물은 열 번 이상 씻어도 마른 떡잎 같은 게 나온다. 소쿠리에 수없이 씻어 건진 나물을 들고 수돗가에서 ‘어구구’ 허리를 편다. 갈수록 바람은 더 세지고, 석양은 구름을 붉게 물들인다. 현관을 들어서다 뒤돌아보니 햇발에 젖은 붉은 노을이 ‘참 잘했어요’라고 붉은 도장을 찍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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