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 독일 립슈탓트 시립 음악전문예술종합학교 이남식 교수

독일의 립슈탓트 시립 음악전문예술종합학교 피아노과 과장인 이남식 교수는 1974년 19살의 어린나이에 독일로 건너간 간호사 출신이다.
낯설고 언어가 다른 이국에서 고된 간호사로 일하며 음악을 공부해 대학교수가 되기까지의 힘들었던 이 교수의 삶의 기록은 우리에게 감동과 삶의 의욕을 불어넣을 소중한 사례가 될 것이다. 2019년 새해를 맞아 한국인의 피와 독일의 국적이란 두 문화 사이를 넘나들며 살아온 이 교수의 삶을 소개한다.

한국의 친구와 친지 그리워
 SNS로 많은 대화 나눠요...

 평생 독서가 취미였던 어머니처럼
 저도 책 읽기 주력할겁니다.

딸의 연주에 눈물 흘리던 아버지...
그의 음악사랑 이으려 19세에 독일로

그는 피아노와의 인연을 오래 전 이야기부터 꺼냈다.
“저는 한국전쟁이 끝난 어수선한 1953년에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딸을 넷을 내리 낳은 후 대를 이을 아들이 원했기에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미리 남자이름인 남식(男植)이란 이름을 지어 놓았어요. 어여쁜 여자이름이 아닌 남자 이름을 갖게 된 것에 부끄러움과 불만을 많이 갖고 컸지요.
아버지는 사진업을 하여 돈을 많이 버셨습니다. 전쟁 뒤 국정이 수습되면서 지금의 주민등록증이 발급됨에 따라 성인 모두가 증명사진이 필요했기에 아버지의 사진업은 크게 성장했지요. 그렇게 번 돈으로 정미소도 운영하셨고, 당시엔 보기 힘든 정원이 딸린 큰 집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학교까지 운영하셨죠.

어느 날 아버지는 자신이 연주할 수 없는데도 피아노를 구입해 들여놓으셨어요. 그뿐 아니라 자식 모두를 위해 바이올린을 사오셨습니다. 저는 언니들로부터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배웠죠. 모차르트와 베토벤 그리고 ‘소녀의 기도’와 같은 음악이 항상 집안에 울렸습니다. 언니가 ‘G선상의 아리아’를 바이올린으로 켜면 이내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지요. 이런 아버지의 음악사랑 감수성 때문이었는지 저는 일찍부터 음악인이 되려는 DNA를 가진 듯합니다.”
부친이 설립·운영했던 사립학교가 정부방침으로 공립학교로 전환되면서 가세(家勢)가 기울었다. 음악인이 돼야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음악 선진국인 독일에서 공부해야 했기에 이 교수는 1974년 19살 어린나이에 간호원국가고시에 합격해 독일행에 올랐다.

“꿈과 현실 괴리로 눈물의 독일생활
버텨낸 건 아버지의 격려편지였죠”

독일생활 첫해, 아버지로부터 격려와 위로의 글이 담긴 70여 편의 편지를 받은 덕분에 낯선 독일생활을 견디며 무난하게 지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꿈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고통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언어의 장벽,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으로 다시 짐을 꾸려 한국의 사랑하는 부모형제와 친구 곁으로 돌아가고픈 향수병으로 울며 밤을 지샌 날이 많았다고 한다.
단 몇 시간만이라도 고국으로 날아가 가족과 친구를 만나 조잘대다가 다시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러나 당시 소련의 영내 비행금지로 한국에 가려면 편도 24시간 비행에다가 항공료도 엄청나 엄두를 낼 수 없었다고 한다.

간호사 봉급 일부를 송금하고도
2년간 입학자금 모아 음대 입학

이 교수는 1974년 독일 도착 후 도르트문트 시립병원에 근무를 했다. 이때 독일인 친구집에 놀러갔는데, 9살 친구동생이 갑자기 이 교수 앞으로 와 손가락을 교수 눈앞에 대고 왼쪽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동양여인을 처음 보는데다가 눈이 너무 작고 옆으로 가늘게 찢어져 자기 손가락이 제대로 보이는지 알아보려고 했다는 것이다.
“당시 생경한 동양인을 대하는 독일인의 모습을 그 꼬맹이로부터 알 수 있었죠.”
당시 독일 간호사의 봉급이 한국의 장관급 월급에 육박하는 많은 액수여서 돈 일부를 고국에 송금하고도 2년 만에 입학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마침내 그는 1976년 데트몰드 국립음악대학 피아노 및 기악교육학과에 입학을 하게 된다. 그리고 1979년 대학교 졸업 후 동 대학원 피아노과로 진학해 간호사 취업 10년 만인 1983년 수료하고, 뮌스터시립음악전문학교 피아노 강사에 취임해 대학교수로 수직 상승하는 성공을 거뒀다. 당시 그는 음악공부보다 독일어 배우는 것이 더 힘들었다고.

이남식 교수는 40년간의 피아노교육자로서 학생들을 지도했던 그녀만의 교육법을 얘기했다.
“악기 하나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육체와 정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수년간의 시간이 필요하므로 목표에 이르기까지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학생들을 독려했어요. 그리고 음을 내는 순간은 자신의 기대와 표현력이 동일해야 된다고 강조했지요. 그것은 음악도로서 일생을 두고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것도 깨우쳐줬죠. 그리고 학생들에게 무난한 기교와 테크닉, 그리고 작품이 만들어졌던 역사적 배경들을 고려해 자신의 표현력을 작곡가가 원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격려하며 이끌어주려고 힘썼죠.”

퇴직 앞두고 자녀에게 전할 책 저술
독일·한국·네덜란드어로 발간

이남식 교수는 올 연말이면 40년간의 피아노 교육자로서의 짐을 내려놓고 퇴직연금을 받아 살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정년을 앞두고 성인이 된 자녀들에게 다하지 못한 말들을 책으로 엮어 선물을 했다.
독일어로 쓴 그의 책은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소개됐다. 오랫동안 쓰지 않고 듣지 않아 한국어를 많이 잊은 탓에 한국어판은 한국인의 도움을 받아 2017년 출간했다. 그리고 올해는 네덜란드어로도 번역해 책을 내놓았다.

이 교수는 책을 통해 자신의 삶의 발자취를 남겨 놓은 건 잘한 일이라고 했다.
이남식 교수는 요즘 한국의 친구들, 형제자매들과 SNS를 통해 많은 대화를 나눈다고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이 얘기하고 싶어요. 그것은 아마도 만날 수 없는 세월이 너무 빨리 다가오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나이 많은 사람의 아쉬움인가 봅니다.”

그는 독일남자를 만나 결혼해 독일국적을 얻었고 세 자녀를 뒀다. 유치원에 방금 들어간 첫째 손자와 이제 겨우 8개월인 둘째 손자가 코레아할머니한테 달려올 기대에 남편과 함께 창문 앞에서 서성댄다고 했다.
“2011년 돌아가신 친정어머니는 항상 일기를 쓰셨고 90을 앞두고도 안경을 코 위에 비스듬히 올려놓으시고 역사소설을 읽으셨어요. 저도 어머니처럼 책을 읽으며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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